자욱한 먼지 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야말로 한 끗 차이로 죽을 뻔한 위력이었다.
“휴.”
내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영주 놈이 이가 갈린다는 듯 말했다.
“운이 좋았군. 어디 워리어급도 안 되는 놈이 건방은!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형제들과 부하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찰나, 나는 왼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조용히 빼내었다.
스윽.
어떠한 빛도, 요란한 소리도 없었다.
파괴적인 기운의 파동조차 일지 않은, 기괴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철퍽!!
“······?”
갑자기 영주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머리 위로 무겁고 미적지근한 액체가 확 쏟아졌다.
찰나의 순간 비릿한 철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영주는, 직후 얼굴을 훔쳐내다 말고 얼어붙었다.
손바닥 가득 진득하게 묻어나는 것은 붉고 축축한 선혈이었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확장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인지를 초월한 비현실 그 자체였다.
방금 전까지 살기를 뿜으며 나를 덮치던 자식들과 부하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그저 피와 살점의 파편이 되어 사방의 대지와 나무에 흩뿌려졌을 뿐이었다.
스치듯 지나간 무력이 빚어낸 찰나의 지옥도.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조차 없는 신화적인 격차였다.
“네······ 네놈,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영주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비명을 질렀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얼굴로, 이성을 잃은 놈이 다급하게 마법을 전개하려 손을 치켜들었다.
스산한 바람이 일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귀신처럼 그의 턱밑에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파랗게 질린 채 무겁게 고개를 돌리는 영주를 향해, 나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10년 뒤에 보자.”
퍽―――!
그 한마디와 함께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목통에서 치솟는 혈액이 허공으로 잔인하게 분수쳤고, 영주의 사체는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나는 잽싸게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칼로스의 힘이 봉인 되며 다시 나약한 한스의 몸으로 돌아오는게 느껴졌다.
아······ 쓸데없이 폼을 잡느라 평소보다 시간을 더 쓴 게 화근이었다.
“크윽!”
머리가 깨질 듯한 반동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바닥에 평민사위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거친 숨을 내쉬는 게 기절만 한 듯싶었다.
나는 안도할 새도 없이 녀석을 뒤로한 채, 빠르게 어두운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간신히 산을 내려온 나는 인적이 드문 절벽 밑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지를 빼고 본래의 무력을 사용할 때마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몇 번을 겪어도 이 끔찍한 감각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아······ 하아······”
한참 동안 몸을 짓누르는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땅을 짚고 일어설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어제 파티원들과 함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바로 그 절벽 아래였다.
그곳에는 여전히 낮에 처치했던 블러드 그런트 베어의 사체가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지독한 썩는 냄새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소매로 코를 틀어막고 서둘러 자리를 지나치려는데,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시선을 붙잡았다.
거대한 곰의 손바닥 안쪽, 그 가죽 위에 비정상적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인위적인 마름모 모양의 문양이 보였다.
“······이거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기호였다.
하지만 머릿속을 맴돌 뿐, 당장 뚜렷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마수조차 누군가 인위적으로 풀어놓았다는 건데···
나는 찝찝한 의문을 뒤로한 채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수도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드디어 수도의 약속한 여관에서 레이나 일행과 재회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레이나 일행은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조치하고, 곧장 왕국 기사단으로 향했다고 했다.
영주가 아이들을 납치해 금기된 흑마술을 부리려 했다는 사실을 고발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기사단이 서둘러 토벌대를 꾸려 영지 쪽으로 출정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대가리는 날리고 왔는데, 헛걸음하겠군.’
차마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놈들이 모두 대가를 치렀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며칠 동안이나 씻지 못해 온몸에 찌든 묵은 때를 시원하게 씻어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딱딱한 흙바닥이 아닌 푹신한 여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등 뒤로 몰려오는 안락한 온기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음 날, 우리는 모두 오래간만에 늦잠을 잤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긋하게 일어났다.
그 뒤로 며칠간은 온전한 휴식과 정비의 시간이었다.
흠집 난 무기와 방어구를 대장간에 맡기고, 필요한 보급품을 채워 넣었다.
밀린 잠을 자고 잘 차려진 식사를 먹으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털어냈다.
그렇게 겨우 인간다운 몰골을 회복하고 다시 긴장을 바짝 조이려던 참이었다.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막 움직이려던 그때, 왕국 기사단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우리는 지체 없이 기사단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수사를 지휘했던 기사단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기사단이 영주의 대저택에 도착했을 때 영주와 그의 핵심 자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저택을 수색하던 중 우리가 제보했던 산 정상의 제단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영주는 머리 부분이 완전히 폭발해 형체도 없이 사라진 채, 끔찍하게 몸뚱이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제단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고요. 정황상 자식들과 최측근 수하들로 추정되는 핏흔인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사라지자 당황한 영주가 의식을 강제로 무리하게 진행하려다, 제어 능력을 잃고 마법이 통째로 폭주해 폭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현재 기사단의 공식 의견입니다.”
기사단장이 잠시 말을 고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지옥 같은 제단 한편에 영주의 사위가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해 구조했습니다.
아무래도 영주 놈이 사위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금단의 마법을 완성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기사단장의 진지한 분석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재단에서 뻘짓거리 하다가 자폭한 거로 보이겠지.’
내가 대충 짜놓은 판에 고맙게도 기사단 전체가 낚여 주었다.
속으로 깊은 흐뭇함을 느끼던 와중에, 기사단장이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덧붙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악행에 가담하지 않았던 영주의 딸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그녀의 남편이 앞으로 이 영지를 이어받아 다스릴 예정입니다.가문이 통째로 멸문당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한 셈이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깊고 묘한 안도감이 부드럽게 밀려들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쉐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이번에 새로 영주가 되는 그 사람은 이름이 뭔가요? 성이 혹시······ 리미티스인가요?”
리미티스. 정말 오랜만에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보는 나의 성(姓)이었다.
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나의 본명은 ‘칼로스 리미티스’였다.
혹시 그 유능한 사위가 내 숨겨진 핏줄이라도 되는 걸까, 쉐론은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질문을 받은 기사단장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 대륙의 재앙 칼로스의 후예가 아닐까 해서 묻는 거군요.
아닙니다.
새로 영주가 된 분은 칼로스와는 아무 상관 없는 뒷골목 평민 출신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에반 라이트’라고 하더라고요.”
에반 라이트.
비록, 나(칼로스)의 후손은 아니었지만, 뒷골목 출신 평민이라는 말에 그 평민사위 녀석이 대견스러웠다.
기사단장이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참, 그리고 에반 라이트 님이 나중에라도 스로칼 파티원분들이 오시면 꼭 한번 저택으로 모셔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이들을 무사히 구해주고, 결과적으로 자신까지 구원해 주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이죠.”
그 말을 들은 레이나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영지 쪽에 잠시 다시 들를 일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그러자 옆에 있던 빌이 레이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모기만 한 소리로 소근거렸다.
‘거길 왜 다시 가? 영지에 뭐 두고 왔어?’
진심으로 귀찮다는 듯 툴툴거리는 빌의 반응에, 레이나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겠다는 듯 조용히 눈짓을 보낼 뿐이었다.
동료들의 소란스러운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나는 가슴속에 차오른 묘한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우리는 마침내 기사단 사무실의 무거운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오크웰 영주와 관련된 상황도 깔끔하게 정리되었고, 며칠 내로 기존에 받았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포상금이 들어올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 ‘스로칼 파티’의 이름도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직접 일거리를 찾아 발품을 팔지 않아도, 앞으로는 의뢰가 알아서 굴러들어올 터였다.
내 젊은 시절, ‘칼로스’로 명성을 떨칠 때도 밀려드는 의뢰가 끊이질 않았었다.
뭐, 냉정하게 말해서 이 모든 게 다 내 덕분인 셈이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이대로 안주했다간 조만간 큰 위험에 직면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