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한스! 일어났어요?”
숙취로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어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마신 싸구려 술이 문제였다.
‘······빌어먹을.’
갈라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도 비루한 몸이란 말인가.
몇 잔의 술조차 이겨내지 못해 허덕이는 꼴이라니.
근육 하나 잡히지 않은 앙상한 팔다리와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을 지르는 장기들까지, 정말이지 잘난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구에서의 내 본명은 ‘김한수’였다.
그래서 어제 마법사 레이나에게 대충 둘러댈 이름이 필요했을 때, 무심결에 그 흔적을 담은 이름을 뱉어버렸다.
“한스.”
이 세계의 전설이었던 ‘재앙’의 이름도, 지구의 낙오자였던 ‘김한수’도 아닌,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내의 이름.
그것이 지금의 나약한 내 몸뚱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껍데기였다.
“아, 머리가 좀 울려서요. 씻고 금방 내려갈게요.”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충 대답을 던지고는 세수를 하기 위해 물바가지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물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젖은 얼굴을 들어 거울 속을 들여다보자, 어제 내 갑옷을 본 마을 사람들의 경악 섞인 반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의 내 모습은 나만이 아는 나의 어린 시절과 똑 닮아 있었다.
만약 내 과거를 기억하는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내가 환생했거나 있지도 않은 ‘이둔의 사과’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다.
철저한 신분 세탁이 필요했다.
나는 우선 덥수룩하게 자라있던 수염을 미련 없이 밀어버렸다.
그리고 평생을 관리해 본 적 없어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머리카락도 과감하게 잘라냈다.
전설이라 불리던 시절의 나는 단 한 번도 짧은 머리였던 적이 없으니, 이보다 완벽한 위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저 구석에 처박힌 갑옷이었다. 저 화려하고 흉흉한 갑옷을 어찌 처리한단 말인가.
그때,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기발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세상을 종횡무진하던 시절, 내 목에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차라리 내 죽음을 스스로 증명해버릴까.’
모험가 길드에 저 갑옷을 증거로 넘기고, ‘재앙’이라 불리던 자가 죽었음을 공식화하는 것이다.
나를 죽인 대가로 내가 상금을 받는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 갑옷을 목격했으니 훌륭한 증인이 되어줄 테고, 누구도 오르지 못할 엔데르 산맥 정상에 남겨진 산장 흔적은 완벽한 물증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전설 속의 괴물은 죽고, 이곳엔 오직 평범한 사내 ‘한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매직백에서 예전에 입던 옷을 꺼내 입으려다 멈칫했다.
‘매직백’은 상위 헌터나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귀중품이다.
내가 고위 귀족이었으니 소지한 것 자체는 당연했으나, 문제는 내용물이었다.
들어있는 옷들이 죄다 화려한 귀족의 의상뿐이었다.
어제는 옷이 헤질 대로 헤진 상태라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눈쓸미 좋은 자가 있다면 단번에 귀족의 복식임을 알아챌 터였다.
이 또한 골칫거리였다.
결국 ‘몰락한 귀족’ 행세를 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하리라 생각하며 다시 공간을 뒤적였다.
다행히 왕좌에 앉아 있던 시절, 잠행을 위해 맞춰두었던 수수한 옷 한 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레이나 일행과 아침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본 레이나가 먹던 수프 스푼을 멈추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 한스 씨 맞아요?”
레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어제는 피와 먼지에 찌든 덥수룩한 수염과 산발이 된 머리 때문에 나이조차 가늠하기 힘든 괴인의 모습이었을 테니까.
“아,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서 좀 정리했습니다. 보기 흉했죠?”
내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옆에 있던 동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흉하다니요! 완전히 딴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수염 속에 그런 얼굴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역시 몰락했다 해도 귀족은 귀족이네요. 인물이 훤하십니다.”
레이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정말······ 훨씬 보기 좋네요. 이제야 좀 사람 같달까.”
그녀의 칭찬에 나는 적당히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일단 첫 번째 신분 세탁은 성공적인 셈이었다.
식탁 앞에 마주 앉았지만, 레이나는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레이나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한스 씨,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그녀의 눈빛에는 은근한 걱정과 함께, 혹시라도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라면 돕고 싶다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글쎄요. 일단 칼로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갑옷을 처리해야 하는데 고민이네요.
추위를 피하려고 임시방편으로 주워 입긴 했지만, 계속 가지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내 대답에 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칼로스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져가면 보상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그게 진짜든 아니든 칼로스의 장비인 건 분명해 보이니, 모험가 길드에 제출해 보세요.
나머지는 길드에서 알아서 조사할 거예요.”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이렇게 추임새를 넣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내 계획에 자연스러운 명분이 생기니까.
식사를 마치고 레이나와 함께 모험가 길드를 방문해 칼로스의 갑옷을 제출했다.
대륙의 재앙이라 불리던 칼로스의 장비인 만큼, 길드 측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들은 이 사실이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대륙 전체가 뒤집어질 대사건이라며, 길드의 정밀 감정과 확증 절차를 거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안내했다.
복잡한 서류 작업과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 공세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 레이나가 나섰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길드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절차를 간소화시켰고, 까다로운 확인서 작성까지 일사천리로 끝내주었다.
덕분에 내가 할 일이라고는 마지막에 대충 서명 한 번 하는 게 전부였다.
길드를 나서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상관없었다. 돈 따위야 내 매직백 안에 차고 넘치니까.
나는 보상이 결정되면 어느 지부에서든 찾을 수 있게 조치해달라고 요구한 뒤, 짧은 증서 한 장을 받아 쥐었다.
아침에 헤어지며 점심때 보자던 레이나의 동료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식당 구석 자리에 앉으니 그들의 면면이 보였다.
구성원은 총 3명. 베테랑 검사와 스펠 메이지, 스펠 소드까지 끼어 있으니 어디 가서 대접 못 받을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햇병아리 정도로 보일 뿐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남 얘기하듯 툭 던졌다.
“그 칼로스를 쫓아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요. 대체 어떤 이유로 그 괴물을 쫓는 겁니까?”
워낙 원한을 많이 산 몸이다 보니 복수를 꿈꾸며 쫓아오는 무리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이들도 그중 하나겠거니 생각하며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레이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희는 그저 그자의 행적을 쫓아다니며 수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 수습이라니요?”
내 되물음에 옆에 있던 베테랑 검사 ‘빌’이 술잔을 비우며 웃으며 대꾸했다.
“그 노인네가 여기저기 싸지른 똥을 치우고 다니는 중인거죠. 하,하”
내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스펠 소드인 ‘쉐론’이 말을 이었다.
“이번 마을처럼 그자 때문에 몬스터가 습격하거나 하면, 헌터가 필요할 테고, 거기에는 돈이 따른다.
누구든 이 문제롤 해결하면 영웅 대접과 짭짤한 보상을 받게 되지.”
“이번에도 저희는 여관이나 음식 문제, 금전 등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녀석이 죽으면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발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어떻게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동전을 줍겠다는 생각을 할까.
나를 쫓아다니며 콩고물을 주워 먹고 있었다니. 지구에서도 멍청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와, 대단하네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같이 수행을 목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군요.”
나는 짐짓 감탄하는 척하며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칼로스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 영리한 녀석들이 그려낼 다음 행적이.
내 물음에 레이나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어제 동료들과 진지하게 상의해 봤는데요. 역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옆에서 고기를 씹던 빌이 거들었다.
“어차피 해왔던 일이고, 칼로스의 행적을 계속 쫓을 생각입니다.
그 노인네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니까.
물론 가끔 허탕을 칠 때도 있겠지만, 그렇게 실적을 쌓고 인지도를 높이다 보면 저희를 알아봐 줄 백작이나 자작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운 좋게 귀족가에 고용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은 편하게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빌이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재앙을 쫓아다니다가 인생 역전이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업 아닙니까?”
이 기막힌 녀석들! 나는 지난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 막막하던 차였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었는데, 이런 녀석들을 쫓아다니면 내 고민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나는 감탄하는 척하며 대답했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선배님들, 혹시 제가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동행하면 안 될까요?
혼자 돌아다니다가 벌써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쉐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