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마력을 삼킨 대가

나는 망토의 깃을 고쳐 잡으며 숲길을 치고 나가는 적들의 등 뒤로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레이나 일행이 있는 리버포드로 향하는 여섯 명의 무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달리던 녀석들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중 조장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 귀찮다는 듯 짜증스레 무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정말 못해먹겠네.

이미 목표가 사라진 걸 어쩌겠어. 다들 여기서 밤을 청한다.

이 밤중에 눈이 뒤집혀서 달려봐야 체력만 빠지고 소용없어.

날이 밝는 대로 앞마을에 들러서 마차를 수배해 타고 간다.”

그 말에 지쳐 있던 다른 수하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들은 방심한 채 주변의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와 쉐론은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익숙한 던전에서 사용하던 수신호가 오갔다.

각자 나눠서 놈들을 하나씩 제거하자는 거다. 던전에서도 자주 써먹던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잠시 후, 저만치 어둠 속에서 쉐론이 한 놈의 목을 부드럽게 꺾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였다.

나 역시 망토로 자취를 감춘 채, 저쪽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녀석에게 몰래 다가갔다.

그러고는 ‘도망자의 신발’을 발동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단숨에 녀석의 등 뒤로 파고들어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녀석은 비명은커녕 제대로 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는 녀석이 고꾸라지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재빨리 몸을 붙잡아 바닥에 잘 뉘어 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타깃으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지며, 모닥불을 피우려던 자리에 남은 적은 단 두 명뿐이었다.

잠시 후, 무슨 기척이라도 느낀 건지 조장쯤 되는 녀석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모닥불 준비하던 녀석들과 화장실 간 녀석들이 왜 안 오지? 이상한데······ 경계해라!”

옆에 있던 수하가 황급히 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 놈들의 등 뒤 어둠 속에서 쉐론이 휘두른 마검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환영의 칼날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수하는 그대로 칼날에 꿰뚫려 쓰러졌고, 조장은 직감적으로 검을 휘둘러 잔상들을 받아쳤다.

조장이 되는 녀석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아뿔싸! 네놈들이구나!”

내가 맞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녀석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칼로스의 유물을 갖고 있는 자가 정말 있었군!”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그런 거 아닙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녀석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그간 성능이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 오늘 써먹을 수 있겠군! 그때 그 녀석처럼 허망하게 당하진 않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이 가슴에서 금빛 문양이 새겨진 물약병을 꺼내 마셨다.

분명 아까까진 쉐론과 비슷한 수준의 기운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매직 나이트급으로 힘이 폭발하듯 상승했다.

이어 녀석이 하늘을 향해 기괴하게 생긴 유물을 던졌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녀석이 마공간을 펼친 것이다.

마력이 거의 없는 약한 한스인 나는 녀석의 압도적인 마력 압박에 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난번 상인들과 이동 중에 만났던 마스터급 전사보다는 약해 보였지만, 저렇게 다양한 유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보아 만만치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반면 쉐론은 이 짓눌리는 압박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즉시 검을 치켜들고 녀석을 향해 거침없이 쇄도했다.

검신에 시린 전격을 두르고 사방으로 번개를 뿌리며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녀석의 힘은 이미 한 단계 위였다.

더군다나 이 마공간은 철저하게 시전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쉐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전격이 얼마 가지 않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이건 전형적인 마력을 흡수하는 마공간이었다.

순수한 물리력만 가진 자라면 그래도 싸워볼 만한 상대겠지만, 나는 압박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고 쉐론은 마력이 실시간으로 빨리고 있었다.

쉐론은 마법을 부리는 마검사였다.

무력 역시 나름 훌륭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녀석의 압도적인 힘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녀석이 칼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겨우겨우 방어해 내는 쉐론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이윽고 녀석은 쉐론에게서 빼앗은 마력을 역으로 이용해, 거센 전격을 휘두르며 쉐론을 직격했다.

강한 타격을 허용한 쉐론은 눈빛이 흐려지더니, 끝내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녀석이 바닥에서 골골대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네 녀석,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칼로스의 유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자의 말로로군!”

나는 바닥을 짚은 채 몸을 웅크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크윽······ 이렇게 보잘것없는 녀석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냐?”

“네가 어떤 힘을 쓰던 이 공간에서 네 녀석의 힘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너를 죽여 칼로스의 유물을 가져간다!”

내가 고개를 슬며시 들며 말했다.

“예전에 말이다······ 아주 유명한 복싱 선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은 다 가지고 있다고. 쳐맞기 전까지는.”

녀석이 생전 처음 듣는 해괴한 단어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 순간, 손가락에서 은밀하게 반지를 빼낸 나의 얼굴에서 아까까지의 고통스러운 내색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바닥의 먼지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 바로 네가 쳐맞을 시간이다.”

녀석이 크게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힘······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하지만 소용없다! 이 결계 안에서 모든 마력은 나의 것이다!”

녀석이 핏대를 세우며 포효했다.

공간 전체가 웅웅거리며 나의 마력을 강탈하려 날뛰고 있었다.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어준다는 것을 모르는 하룻강아지의 객기였다.

나는 녀석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래? 그럼 한번 감당해 보든가.”

쿠구구구궁—!

심연에 억눌러두었던 마력을 폭발시키듯 해방했다.

방출된 마력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사방의 벽을 사정없이 짓개겼다.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보면서도, 녀석은 제 그릇의 한계를 모른 채 악에 받쳐 광소했다.

“카카카! 해봐라! 얼마든지 집어삼켜 주마!”

결계의 회로를 타고 내 마력이 녀석의 몸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순수한 마력의 정수가 전신을 채우자, 녀석의 눈이 탐욕으로 뒤틀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대한 힘이 온몸의 세포를 짜릿하게 깨우고 있었다.

녀석은 터져 나오는 희열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래, 이거다! 바로 이거야! 더 내놔라! 네놈의 마력을 모조리 내게 줘라! 이 힘만 있으면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성취감에 취해 얼굴을 구기던 그 순간.

콰르릉—!

끊임없이 밀려드는 마력의 파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시냇물인 줄 알고 벌린 입안으로 거대한 해일이 통째로 쏟아져 들어오는 격이었다.

녀석의 눈에 서려 있던 광기가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어윽?! 그, 그만······ 잠깐······!”

비웃음은 처절한 비명으로 변했다.

녀석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이미 한계를 초과해 터질 듯 팽창한 마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흡수된 나의 마력은 녀석의 경맥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거칠게 뒤틀렸다.

그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폭력에 가까웠다.

“끄, 끄으윽······! 컥! 멈춰······ 멈추란 말이다······!”

녀석이 갑자기 목이 졸린 듯 턱턱 거렸다.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사정없이 뒤틀리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가 꺾이더니, 이내 내 앞에 볼품없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얼마나······.”

피를 토해내는 녀석의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쾅—!

음속을 돌파하는 파공음과 함께 내가 녀석의 턱밑까지 거리를 좁힌 탓이었다.

나는 무릎 꿇은 채 부들부들 떠는 녀석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마력은 네 그 알량한 그릇으로 감당이 가능할 때나 뺏을 수 있는 거지.”

“사, 살려······.”

서슬 퍼런 목소리가 유언처럼 녀석의 고막을 찔렀다.

스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끝을 스친 마력의 궤적이 녀석의 목을 가차 없이 날려버렸다.

피가 뿜어져 나오기도 전에, 사체는 이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검을 거두며 잽싸게 손가락에 반지를 다시 끼웠다.

주인을 잃은 녀석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자, 사방을 뒤덮고 있던 마공간이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풀려났다.

그와 동시에 반지를 사용한 혹독한 대가가 밀려왔다.

온몸의 세포가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무래도 오늘 마력을 너무 많이 사용한 모양이다.

나는 밀려드는 고통과 탈진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그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 *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귓가에 ‘타닥, 타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였다.

천천히 눈을 뜨니 어느새 정성스럽게 피워진 모닥불이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고, 그 너머로 쉐론이 나를 기이한 생명체를 보듯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자, 그녀는 어딘지 쑥스러운 듯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냐? ······아니, 괜찮으세요?”

갑자기 왠 존댓말······?

나는 누워 있는 상태로 눈만 깜빡이며 어리둥절해했다.

아직 반지의 여파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나는 누워 있는 상태 그대로 힘겹게 대답했다.

“쉐······ 쉐론, 왜 그래요? 갑자기 무섭게.”

그러자 쉐론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자세를 똑바로 잡더니, 누워 있는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절을 하는 게 아닌가.

“그간 깊은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뭐, 뭐야? 무섭게 왜 이래요, 진짜?”

쉐론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 아까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똑똑히 봤어요.

네가 그 녀석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거요.”

‘아, 드디어 걸렸구나.’

나는 속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미리 핑곗거리로 생각해 두었던 거짓말을 꺼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내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쉐론이 먼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내 목숨을 벌써 세 번이나 구해줬어.

이제야 알겠어······ 저주에 걸린 건 내가 아니라 한스 였다는걸.”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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