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스의 영혼은 아니지만, 그 말에 순간 가슴 한구석이 뜨끔했다.
‘…정곡인가.’
정체를 들킨 줄 알았던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반응을 살피는 대신, 아까보다 훨씬 신중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녀석은 주먹을 휘두를 때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움직였다.
기세를 보니 못해도 상급정도의 베테랑 실력자이다.
반면 지금의 나는 기껏해야 하급 워리어 수준이나 될까.
녀석은 나보다 훨씬 빠를 것이고, 체력 또한 압도적일 터였다.
놈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빼앗은 칼로 간신히 맞서 막아냈지만,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무게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자칫하면 칼을 놓칠 것 같은 압박이었다.
나는 힘으로 버티는 대신, 칼날을 둥글게 흘려내며 녀석의 사선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긴장하게 만드는군.”
녀석이 낮게 읊조렸다.
가소로운 소리였다.
만약 이 반지의 구속을 푼다면, 재해급 몬스터도 아닌 이런 녀석쯤은 1초면 지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고작 이런 놈을 상대로 반지를 개방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말지···. 아,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으니 죽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자존심 굽히는 건 더더욱 싫었다.
“챙! 챙!”
금속음이 숲에 울려 퍼졌다.
녀석의 맹공에 나는 점점 궁지로 몰렸고, 어느새 딱딱한 나무 등걸에 등이 닿았다.
녀석의 입가에 비릿한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이제 끝이다!”
놈이 회심의 일격을 찔러 넣는 순간, 나는 간발의 차로 몸을 비틀었다.
사실 여기까지 밀려난 건 체력 부족 때문이기도 했지만, 녀석을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아까 봐두었던 고목의 깊게 패인 구멍 속으로 놈의 칼날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엇?”
당황한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찰나, 내 눈이 서늘한 광채를 내뿜었다.
나는 주저 없이 녀석의 손목을 베어냈고, 고통에 찬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놈의 복부에 깊숙이 칼을 꽂았다.
이딴 쓰레기 같은 체력으로도 이 정도는 충분했다. 녀석은 어버버거리며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아까 발목을 베여 바닥을 뒹굴던 녀석이 어느새 기어와 내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칼날을 등 뒤로 돌려 찔러 넣었다.
달려오던 가속도 그대로 녀석의 배에 칼이 관통했다.
리더에 이어 두 번째 녀석 역시 피토하며 쓰러졌다.
체력이 바닥나 시야가 흐릿해질 무렵이었다.
처음 내 발길질에 그릇을 맞고 칼을 뺏겼던 놈이 피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 쥔 채, 깨진 눈에서 연신 피를 흘리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녀석은 완전히 겁에 질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저편으로 도망쳐 버렸다.
‘저놈까지 죽여야 뒷탈이 없을 텐데···.’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칼을 쥔 채 그대로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숲의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방금 전까지 생사를 오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흙바닥을 짚으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 비루한 몸뚱이로 버티려면··· 제발 조심 좀 하자, 칼로스.’
천하를 호령하던 기억은 이제 독이나 다름없었다.
머리는 여전히 최강자의 박자에 맞춰 뛰고 있었지만, 현실의 육체는 고작 양아치 몇 명의 습격에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처참했다.
오만함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었다.
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도망친 녀석이 언제 무리를 이끌고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길을 버리고 무성한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길을 따라 가다간 또다시 그런 하이에나 같은 놈들과 마주칠 게 뻔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과거처럼 무작정 휘두르던 힘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지혜다.
* * *
지난 일주일 동안 모리야 마을로 향하며 몬스터를 몇 번 마주치자, 현재 나의 상태가 대충 짐작이 갔다.
체력이 저질이 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쉽게 부상을 당할 줄은 몰랐다.
가벼운 스침에도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회복력만큼은 일반인보다 확연히 빠르다는 점이었다.
전성기 시절, 심장이 뚫려도 반나절이면 수복되던 칼로스 때의 재생력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얕게 베인 상처 정도는 한두 시간만 지나면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났다.
하지만 진짜 최악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칼로스 시절 최고의 무기 중 하나였던 ‘살기 감지’ 능력이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는 것.
과거에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적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코앞까지 다가와도 기척을 모를 정도였다.
그 때문에 은밀하게 다가오는 몬스터에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몸은 망가졌어도 전투에 임하는 예리한 감각과 경험치만큼은 뇌리에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몸뚱이는 삐걱거릴지언정 전투 중 적의 행동을 예측하는 순간적인 대응 능력만큼은 전성기 시절처럼 번뜩였다.
골수에 새겨진 실전 경험. 오직 그것만이 지금의 나를 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이 인형 같은 몸이다.
다행히 반응 속도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었는데, 아마 몸에 배어 있는 노련함 덕분인 듯했다.
하지만 무기를 내리찍어도 힘이 실리지 않아 적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했다.
전투뿐만 아니라 단순한 이동조차 이 저질 체력에는 크나큰 고역이었다.
그나마 매직백이 있어 물건을 넣어두니 망정이지, 등짐이라도 메고 다녔다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거다.
냉정히 말해 내 체력은 일반인에 가깝다. 절대로 중급 워리어급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가혹한 여정 끝에, 마침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약속 장소인 모리야 마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아직 레이나 일행은 당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이곳 모리야 마을로 넘어오는 여정이라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였다.
여관에서 여독을 풀며 지낸 지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레이나 일행은 올 생각이 없었다.
“너무 늦는 거 같은데?”
■ ■ ■
같은 시각.
레이나 일행은 칼로스의 마지막 행적을 쫓던 원정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목적지인 모리야 마을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챙—! 서걱!
마을 초입의 웅성거리는 수풀 사이에서, 그들은 때마침 마주친 고블린 무리를 소탕하는 중이었다.
레이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다행이에요. 우리가 미리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근처 민가에 큰 피해를 줬을 거예요.”
쉐론이 투덜대며 대답했다.
“레이나, 이런 몬스터는 마을 길드에 가서 정식 절차를 밟아야 보상도 높다고.”
“그래도 나는 레이나가 늘 옳다고 생각해.”
빌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거들었다.
정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차를 마시던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품행이 불량해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중 한쪽 눈이 찢어져 머리에 붕대를 감은 녀석이 불쑥 물었다.
“혹시 이쪽으로 비쩍 마르고, 숟가락 하나 들 힘도 없어 보이는 하얀 얼굴의 놈이 지나가는 걸 봤나?”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누가 봐도 한스를 말하고 있었다.
레이나가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그 녀석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그 자식이 내 눈과 다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고, 사악한 힘을 사용해 내 형을 죽였단 말이다! 우리는 그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레이나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는 저희와 같이 마을을 구한 영웅입니다.”
그러자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눈을 희번득거렸다.
“아는 녀석인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가 칼을 뽑아 들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전장으로 변했다.
전세는 불리했다. 적의 수는 열둘이었고, 하나같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하급 익스퍼트와 중급 스펠 소드까지 섞인 정예 무리였다.
* * *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은 여덟 명이 남았지만, 이쪽의 피해도 막심했다.
앞을 지키던 빌은 이미 만신창이였고, 쉐론의 팔에서도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방어막을 유지하던 레이나 역시 한계에 다다른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실력이 있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끝내라!”
우두머리의 명령과 함께 마법 공격이 쏟아졌다.
결국 방어막이 깨졌고, 거대한 폭발과 함께 일행은 뒤로 튕겨 나가 바위에 부딪히며 모두 정신을 잃었다.
“칫, 아직 숨이 붙어 있군. 저 여자애만 남기고 나머지는 처리해라.”
■ ■ ■
녀석들이 빌과 쉐론을 향해 칼을 치켜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나는 숨겨두었던 기척을 풀며 슬그머니 걸어나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어눌하고 유약한 목소리를 내어 툭 내뱉었다.
“왜 이리 늦나 했더니······ 이······ 이상한 놈들한테 시간을 뺏기고 있었군.”
내 목소리가 들리자, 녀석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우두머리가 고개를 느릿하게 이쪽으로 돌렸다.
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었을 것 같은 내 비루한 몰골을 확인한 녀석의 눈에 황당함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