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말한 ‘인과(因果)’.
그것은 내가 지난날 눈물 흘리게 했던 수많은 원망과, 어딘가 내 피를 이어받아 숨 쉬고 있을 인연들.
그리고 내가 과거에 대륙을 헤집으며 무심히 싸질러놓은 온갖 형태의 흔적들을 말하는 것일까?
“난 이제 ‘무(無)’로 돌아갈 거야. 마지막 자비로 네가 그토록 갈망하던 젊음을 주지.
하지만 너에게 허락된 시간은 딱 10년뿐이야.”
“···어째서 10년입니까? 차라리 이대로 데려가시는 게 나을 텐데…”
나의 무심한 물음에 신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10년 내로 이 세상은 결국 망해버릴 테니까. 네가 과거에 뿌려두었던 지독한 업보의 씨앗들이 하나둘 깨어나서 세상을 삼키기 시작할 거거든.
재앙이 완성되기 전에, 네 손으로 직접 돌려놓아 봐. 그게 네게 남은 유일한 속죄의 기회야.”
“멸망이라니? 제 업보가 세상을 삼킨다는 겁니까······?”
내가 당혹감에 말을 흐리자, 신이 손바닥 위에 소박한 은빛 반지 하나를 띄웠다.
“선물이야! 그 반지는 너의 10년짜리 수명을 붙들고 있는 장치이자,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들 족쇄지.
물론, 언제든 반지를 빼서 예전의 힘을 되찾아도 좋아.”
신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하지만 명심해야 해? 반지를 빼는 순간 네 생명력은 무서운 속도로 타오를 테니까.
힘을 휘두를 때마다 수명이 며칠, 아니 몇 달씩 깎여 나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10년이라는 시간도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질 수 있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신의 육신은 먼지가 되어 흩어져 갔다.
그와 동시에, 영혼 깊숙한 곳을 구속하던 무언가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오장육부를 짓개는 듯한 압박감이 차오르더니, 끝내 버티지 못한 살가죽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몸이, 깨지고 있다.’
살점과 허물들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떨어져 나갔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고통의 폭풍이 지나간 뒤, 매끄러운 감각이 피부를 타고 들이쳤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에 핏자국을 털어내고 비춰보았다.
거친 수염과 치렁치렁한 긴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그 너머로 깊게 패어 있던 눈가와 이마의 주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곳엔 그토록 그리워하던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내가 있었다.
어느새 내 손가락에는 은빛 반지가 살을 파고들 듯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여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극한의 추위가 몰려왔다.
마력과 근력이 거두어진 자리,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나약함’이라는 공포였다.
봉인의 반지 탓에 이제 나는 겨울바람조차 견디기 힘든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아윽, 젠장······!”
실오라기 없는 맨몸 위로 칼바람이 스치자 이가 덜덜 떨렸다.
당장 얼어 죽지 않으려면 뭐라도 입어야 했다. 허리춤의 매직백을 거꾸로 탈탈 털었다.
그 과정에서 희귀한 고대 아티팩트와 전설적인 유물들이 흙먼지 위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돌덩이일 뿐이었다.
“옷, 옷은 어디 있는 거야······!”
가방 바닥에서 드디어 두꺼운 감각이 걸렸다.
평소라면 몸이 둔해진다고 쳐다보지도 않았을 무거운 갑옷이 보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사시나무 떨듯 하며 허겁지겁 껴입었다.
쇳덩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매서운 바람만큼은 확실히 막아주었다.
갑옷을 다 껴입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밀려드는 피로와 지독한 추위 탓에 머릿속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바닥에 흩어진 유물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10년 뒤면 나는 소멸한다.
그전까지 내가 뿌린 지독한 씨앗들을 거두어야 한다. 하지만 저지른 악행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나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내가 지나온 행적을 거꾸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지나온 길마다 내가 싸질러 놓은 오물이 가득하겠지.
내 발자국만 따라가면 결과들이 줄줄이 엮여 나올 거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워야지, 별수 있겠나.”
나는 가장 최근에 지나온 작은 마을, ‘에데르’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곳을 휩쓸고 지나가며 몬스터들의 생태계를 처참히 짓밟아 놓았으니, 뒤에 남겨진 것들이 어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우두머리를 잃고 광기에 휩싸인 마수들이 흉폭해져 근처 마을을 습격하고 있을 터였다.
“일단 그것부터 수습해야 한다. 첫 번째 똥 부터 치워야지.”
나는 차가운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며, 예전 같으면 한 걸음에 닿았을 거리를 헉헉대며 걷기 시작했다.
하루 하고 반나절을 꼬박 걸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버텨내며 겨우 산 아래로 내려왔다.
예전 같았으면 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길이었다.
둔해진 몸 탓에 비탈길을 수없이 구르고 가시덤불에 처박혀야 했다.
추위를 피하려 허겁지겁 껴입었던 두꺼운 갑옷은 바위에 찧고 쓸려 이미 사방이 찢어지고 일그러진 상태였다.
그 깨진 틈새로 칼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 망가진 옷가지마저 감지덕지하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진흙탕을 구른 처참한 몰골이 되어서야, 마침내 저 멀리 인가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어귀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날뛰는 마수들과 마을 주민, 그리고 몇몇 헌터들이 뒤섞여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영창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를 지켜야 할 방패지기가 몬스터의 일격에 밀려 나가며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마법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머릿속 계산보다 몸은 한참이나 늦게 반응했다.
이토록 허약한 몸뚱이라니. 늪 속을 걷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느리고 답답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검을 재빨리 낚아채 괴물의 숨통에 박아 넣으려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무거운 검의 무게에 휘둘린 내 팔은 허공을 갈랐고, 나는 그대로 괴물의 옆구리에 어정쩡한 몸통 박치기를 시전하고 말았다.
“커헉!”
괴물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지만, 다행히 그 볼품없는 방해가 시간을 벌어주었다.
영창을 마친 마법사가 전방위로 불벼락을 쏟아부었고, 불길에 휩싸인 몬스터들은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다.
나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장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군. 누군가는 내 똥을 대신 치워주고 있어서.’
바닥에 처박힌 채 속으로 씁쓸한 안도를 내뱉었다. 그때, 시야에 하얀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고마워요. 당신이 몸을 던져 시간을 벌어준 덕분이에요.”
아까 그 마법사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주변에서는 승전보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드디어 다 무찔렀다!”
“이 망할 놈의 괴물들! 그 미친놈, ‘칼로스’만 아니었어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죽일 놈의 새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욕설의 주인공, 그 ‘칼로스’가 바로 나다. 쏟아지는 악담에 가슴이 뜨끔거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법사의 손을 잡고 헉헉대며 몸을 일으켰다.
“가…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입에서 나간 소리였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평생 누구에게도 숙여본 적 없던 오만한 혓바닥이, 약해진 몸의 생존 본능에 따라 제멋대로 공손하게 굴절되어 있었다.
비굴할 정도로 더듬거리는 말투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세상에… 이게 약자의 몸에서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대사로군.’
비참함과 생경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이 비굴함이야말로 10년을 버티게 해줄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수선했던 전장이 정리되자, 사람들에 떠밀려 여관 1층 술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어디서 오던 길인가요? 혹시 오다가 눈매가 매섭고 체격이 건장한 노인을 보지 못했나요?”
자신을 ‘레이나’라고 소개한 마법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거구의 용병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보탰다.
“우린 본래 그 노인, ‘칼로스’를 쫓고 있는 헌터들입니다.
놈이 지나간 자리는 재앙이나 다름없거든요. 당신도 소문은 익히 들었죠?”
‘잘 알지… 그 재앙이 바로 나니까.’
나는 타들어 가는 속을 감추며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헌터 한 명이 내 어깨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외쳤다.
“어? 잠깐, 그 갑옷…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거 칼로스의 문장 아니야?”
순식간에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그러네? 나도 초상화에서 본 것 같아!”
“설마… 당신, 칼로스를 잡은 겁니까?”
휘둥그레진 눈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등 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이건 예상 못 한 전개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 머릿속에 기막힌 핑계 하나가 스쳤다.
나는 최대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떤 산장 앞을 지나게 됐는데…
거기 갑옷이 떨어져 있더라구요.
날은 너무 춥고 몸은 떨려서, 살려고 주워 입은 것뿐입니다.
이게 정말 칼로스 것인가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관 안이 발칵 뒤집혔다.
“칼로스가 사라졌다고?”
“천벌을 받은 거야! 신께서 마침내 그 인간 탈을 쓴 괴물을 데려간 거라고!”
“맞아, 그 나이에 그렇게 팔팔했던 것부터가 비정상이었어. 드디어 신의 심판을 받은 거지!”
이때, 룬 나이트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갑옷이 있던 바닥에 다른 건 없었나?”
나는 기억을 더듬는 척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 핏덩어리와 살점 같은 것들이 흩뿌려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주변으로 기괴하게 생긴 돌덩이나 오래된 무기 같은 기묘한 물건들도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추워서 정신이 없다 보니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
“결국······ 신의 심판을 받은 건가?”
사내의 확신에 찬 한마디에 여관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결국 죄 값을 치렀군!”
“위대한 아루스 신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신 거야!”
“이제 인간 재앙의 시대는 끝났다! 자유다!”
아까 몬스터를 물리쳤을 때보다 훨씬 더 열광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환호했다.
“자네, 우리에게 최고의 소식을 물어다 줬군! 행운의 상징이야!”
전설의 칼로스였던 나는, 그렇게 내 죽음을 축하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모르게 ‘신의 심판을 받아 소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씁쓸하면서도 묘한 안도감이 교차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