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윽.
왼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비틀어 뺐다.
그 순간, 봉인되어 있던 마력이 전신을 타고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납덩이처럼 무겁던 검이 순식간에 깃털처럼 가벼워졌고, 둔해졌던 모든 감각이 리미터를 해제하듯 날카롭게 깨어났다.
고개를 들어 달려오는 다크팽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
미친 듯이 돌진하던 다크팽의 거구가 허공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놈은 본능적으로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했다는 것을 눈치챈 듯, 나를 비껴가며 다급하게 땅을 굴렀다.
하찮은 먹잇감인 줄 알았던 존재의 눈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안광을 본 것일까.
다크팽의 시뻘겋던 눈동자에 거대한 공포가 서리며, 거대한 다리가 눈에 띄게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주변 공기를 알아챈 블러드 울프들은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았고, 몇몇 놈들은 그 자리에서 지려버리기까지 했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과거 내가 야수들의 정점, ‘야수왕’을 도살했을 때 전장을 지배했던 그 절대적인 살육의 분위기를 놈들의 본능이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간이 없다. 쉐론부터 살려야 한다.
타앗!
몸이 지면을 박차고 나간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다.
스윽― 콰아아앙!
공간을 가르는 파동과 함께, 다크팽의 거대한 목이 허공으로 높게 날아올랐다.
평범한 강철검으로는 내 무지막지한 마력을 버티지 못했기에, 놈의 목을 가른 직후 검날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 바스러졌다.
그리고 오른팔에 막대한 마력을 담아 그대로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앙!
무형의 마력 참격이 태풍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포위망을 좁혀오던 블러드 울프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폭풍에 휘말린 종잇장처럼 무참히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 일격에 초토화였다.
전투 종료.
나는 지체 없이 왼손가락에 반지를 다시 밀어 넣었다.
“······으윽!”
반지를 손에 끼우자 억눌렸던 반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신을 찢는 듯한 근육통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극심한 두통이 뇌리를 때렸다.
그리고 역시나,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듯한 음산한 감각이 전신을 잠식해 들어왔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쉐론의 곁으로 걸어갔다.
하이 포션을 쉐론의 입에 흘려 넣자, 경이로운 약효 덕분에 쉐론의 허리는 완벽하게 수복되어 가고 있었다.
으스러졌던 뼈와 찢긴 살점들은 흔적도 없이 붙었고, 새하얀 새살이 돋아나 기적처럼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쇠잔해 가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차올라 그녀의 호흡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이포션 병이 보이면 이상할테니, 서둘러 빈 병을 매직백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나는 더 버티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하게 레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쉐론! 한스! 정신 차려!”
내가 몸을 살짝 움직이자 빌이 말했다.
“한스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쉐론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확실한 것은 바스러졌던 몸이 깨끗이 나았다는 점이다.
아무도 내가 하이포션을 먹였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빌이 나를 부축하며 물을 건네고는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크팽의 목이 날아간 건 처음 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기억이 희미한데······ 희미한 그림자가 다크팽의 목을 친 것 같았어요.”
그러자 레이나가 되물었다.
“쉐론이?”
나는 그저 둘러댄 말이었는데, 상황은 갑자기 쉐론이 한 일로 굳어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빌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지. 쉐론은 늘 멀쩡했어. 지금처럼 큰 상처 없이 기절해 있었잖아.”
레이나가 주변을 살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빌, 상황을 봐. 다크팽은 목이 잘려 나갔고, 블러드 울프들은 광역 마법에 당한 것처럼 한꺼번에 끝장났어.
이 정도 수준의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계열은 흔치 않아.
우리 중에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쉐론뿐이야.”
이야기가 엉뚱하게 흐르고 있었지만, 사실 레이나의 분석은 틀린 게 없었다.
검과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검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마검사가 쉐론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점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쉐론의 주위로 우리는 야영지를 꾸렸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몬스터 요리를 선호하지 않지만, 배를 채워야 했기에 다크팽의 허벅지 살을 잘라 모닥불 위에서 적당히 굽고 있었다.
“한스······.”
빌이 나를 불렀다.
“네?”
“너, 요리해 본 적 없지? 며칠간 지켜봤는데 네가 하는 건 그냥 ‘굽는 것’ 말고는 없더라고.”
정곡을 찔렸다.
사실 나는 요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배가 고프면 대충 구워 먹는 게 전부였기에 요리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김치찌개 같은 걸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이곳의 다양한 양념들을 알지도 못했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평생 남이 해준 음식만 먹고 살았으니, 내게 요리란 그저 불에 굽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귀족 도련님이 무슨 요리를 해봤겠어.
안 되겠다. 앞으로 요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설거지랑 숙소 챙기는 것만 잘해줘.”
나는 민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건 고기 굽는 냄새가 야영지에 진동했고, 그 향기 때문인지 쉐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다급하게 만져보더니 소리쳤다.
“내가······ 내가 멀쩡해!”
나와 레이나, 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채 그녀를 쳐다봤다.
벌떡 일어난 쉐론은 연신 멀쩡한 제 몸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다.”
“나 분명히······ 몸이 두 동강 난 것 같았는데? 누, 누가 치료한 거야?”
쉐론의 물음에 빌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두 동강이라니, 그런 적 없어. 그리고 우리 중에 치료한 사람도 없고. 쉐론, 기억이 뭔가 잘못된 거 아냐?”
“분명히 몸이 잘려서 죽는 줄 알았는데······?”
쉐론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시전했다.
레이나가 분위기를 끊으며 말했다.
“우선 밥부터 먹고 천천히 이야기하자.”
그렇게 어리둥절해진 쉐론과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쉐론은 밥을 먹는 와중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쉐론, 혹시 과거에 저주나 마법 같은 거 걸린 적 있어?”
“저주? 그런 거 걸린 적 없는데?”
“아주 어릴 때라든가 말이야.”
빌의 보충 설명에 쉐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봐?”
“아무래도 이번 상황이나 지난번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마검사’는 너밖에 없으니까.
주변을 둘러봐. 우리가 죽을 뻔했던 그때랑 상황이 많이 비슷하지 않아?”
레이나의 말에 빌이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너는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 무의식중에 발동하는 봉인 같은 게 걸린 걸지도 모르고.”
쉐론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검과 마법이 실존하는 이세계에서 저주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검에 악한 기운을 불어넣어 도륙자로 만드는 저주가 있는가 하면, 귀족들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릴 때 특별한 마법을 걸어두기도 한다.
물론, 다크팽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은 본 적이 없으니 지금의 상황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쉐론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내, 내가 정말 여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다들 믿는거야?”
레이나가 쐐기를 박듯 대답했다.
“한스는 완전히 기절해 있었어. 보다시피 얼굴만 봐도 멍투성이잖아.
그런데 정작 보스와 맞붙었던 너는 옷만 좀 찢어졌을 뿐 멀쩡하지.
결정적으로, 검과 마법을 동시에 다루며 이 난장판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너뿐이야.”
쉐론은 이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챈 눈치였다.
자신은 저주에 걸린 적도, 특별한 물건을 지닌 적도 없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그녀에게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쉐론은 억울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미 확신에 찬 그들 앞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임무를 마친 우리는 곧장 모리야 마을로 향했다. 길드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번 일로 ‘스로칼’ 파티의 인지도는 한층 올라갔고, 주머니에는 묵직한 보상금까지 챙길 수 있었다.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찰나, 길드장이 나를 불러세웠다.
“아참, 한스 군. 잠시만 남으시게나.”
“저 말입니까?”
“레이나양도 이번 원정대에 합류했었으니 같이 들어도 좋겠군.”
길드장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한스 군이 가져온 그 ‘칼로스의 갑옷’ 말이야. 그거, 진짜인 모양이네.”
“······아, 그렇습니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길드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레이나, 자네 파티가 합류했던 에데르 마을의 원정대 보고서가 마무리되어 방금 상부에서 내려왔네.
원래라면 산맥을 오르는 게 불가능한 일인데, 신기하게도 산맥의 마수들이 대부분 처치되어 있어서 단 하루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는 게 정말인가?”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길드장님. 저희도 그 불가능하다는 엔데르 산맥을 그렇게 쉽게 오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스 씨가 거기를 어떻게 혼자 지나쳐 왔나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길드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보고서에 적힌 내용 말인데······ 산장 바닥에 각종 유물과 인간의 살점과 찢어진 피부 허물 같은 것이 다량 떨어져 있었다더군. 자네 눈으로 직접 본 게 사실인가?”
레이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합니다. 뭔가 핏덩어리와 살점 같은 것들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돌덩이나 오래된 무기 같은 물건들도 사방에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