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엘프는 오만한 종족이라 자신들 외의 종족은 하대하기 마련이다.
워낙 장수하는 종족이다 보니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 같은 건 그저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칼로스’ 시절의 나는 엘프의 장수 비결을 알아내고 싶어 수많은 엘프를 쥐어짰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내 능력이 타고난 것인 것처럼 그들 또한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 알아낼 방법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신의 열매 ‘이둔의 사과’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직접 신을 대면했을 때 ‘이둔의 사과’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무 장작을 한 아름 들고 쉐론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마침 집 밖으로 나오던 빌이 우리를 보고는 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 이 새벽부터 둘이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나 봐? 하하!”
그러자 쉐론이 얼굴을 확 붉히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냥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것뿐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거참, 발끈하긴······. 농담이다, 농담.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빌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지만, 쉐론의 분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나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검지와 중지로 제 눈을 가리켰다가 나를 가리키는 ‘너 지켜보고 있다’는 손가락 사인을 날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설마 옛날에 내가 자기네 동족들을 좀 괴롭혔다고 날 따라 다녔던건 아니겠지?’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서둘러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마지막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마을은 북쪽 먼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언덕 위에서 멀리 마을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레이나가 멈춰 서서 말했다.
“밤이 되면 몬스터들이 더 기세를 부릴 테니, 오늘은 이쯤 적당한 곳에서 야영을 하죠.”
빌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는 게 좋겠어. 무리하게 밤늦게 도착했다가 전투라도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쉐론이 주변에 몬스터가 지나간 흔적이 없는지 꼼꼼히 살핀 뒤, 우리는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몬스터들도 결국 다니던 길로만 다니는 법이라, 특별한 발자국이 없다면 야영 중에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쉐론이 옆으로 다가왔다.
“잊지 마라. 늘 지켜보고 있다.”
“네, 네······. 그, 그런데······ 고귀하신 분께서 어쩌다 이런 파티에 끼어 계신 건지······?”
윗사람 대하듯 슬쩍 띄워주며 묻자, 존댓말에 기분이 조금 풀린 듯 쉐론이 대답했다.
“칼로스를 쫓다가 우연히 레이나와 빌이 그놈을 추적한다는 걸 알게 돼서 합류한 것뿐이야.”
“엘프들도 칼로스에게 원한을 샀나요?”
“내가 엘프라는 걸 알게 됐으니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겠지.
과거에 칼로스가 우리 마을에 들이닥쳐 장수의 비결을 내놓으라며 깽판을 친 적이 있어.
우리야 태생이 이런데 그걸 우리가 알 리가 있나?
그래서 누군가 적당히 ‘이둔의 사과’라는 말을 지어낸 거지.”
“······지어냈다고요?”
이미 ‘이둔의 사과’ 따윈 없다는 걸 신의 면전에서 확인하고 왔지만, 그 시작이 엘프의 ‘아무 말 대잔치’였다니.
존재하지도 않는 사과 한 알을 찾겠다고 대륙을 잡들이하며 보낸 내 시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떤 놈이냐. 걸리면 진짜 뒤진다.’
“그래.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아무거나 내뱉은 거지. 그런데 그 멍청한 칼로스 놈은 그걸 또 믿고 진짜로 찾아 떠나더라고. 웃기지 않냐?”
다시 쉐론은 잠시 숲 쪽을 응시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놈은 마을을 떠났어.
문제는 떠나면서 인질을 잡듯 우리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가 버렸지.
나는 그걸 찾고 있어. 그러니 파티원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세계수의 묘목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해. 엘프의 숲을 번성하게 하는 근원이거든.
현재 마을의 세계수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어서 우리가 새로운 묘목을 키우고 있었어.
여러 개를 공들여 키워도 초반에는 상당수는 죽어버리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소중하지..
문제는 지금 남은 묘목이 얼마 안남은 상태고 불의의 사고로 나머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의 숲은 그대로 끝장이야.”
······아, 세상에. 기억났다.
그때 엘프 마을을 떠나면서, 놈들이 금지옥엽 애지중지하던 묘목 하나를 뿌리째 뽑아 매직백에 쑤셔 넣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이공간인 매직백 속에는, 그날의 싱싱함 그대로 멈춰 있는 세계수의 묘목이 지금도 내 품에 있다.
아, 젠장. 돌려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이걸 대체 어쩌냐.
다행히 매직백은 생체 인식이 걸린 귀족용 보급형이라 내가 죽기 전엔 쉐론이 억지로 열 순 없다.
문제는 지난 백 년간 이것저것 마구 쑤셔 넣어둔 탓에, 정작 주인인 나조차 그 묘목이 가방 안 어디쯤 처박혀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게 어디쯤 처박혀 있더라? 설마 아까 꺼낸 냄비 밑에 깔려 있는 건 아니겠지?’
까딱해서 묘목이 부러지기라도 했다간, 쉐론이 아니라 세계수 신(神)이 강림해서 날 죽이려 들 것이다.
나는 등 뒤에 식은땀을 흘리며, 소중한 보물을 보관 중인 게 아니라 시한폭탄을 메고 있는 기분으로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아침이 밝았다. 떠나기 전, 레이나가 우리의 작전은 늘 똑같다며 입을 열었다.
“적들이 큰 공간에 모여 있다면 제가 광역 마법을 쓸 테니 저를 보호해 주세요. 만약 적들이 여기저기 분리되어 있다면, 예전에는 셋이서 적당히 싸웠지만 이제는 팀원이 늘었으니 2인 1조로 싸우는 게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러자 쉐론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자기 파트너로 지정했다. 레이나가 출발하며 나에게 물었다.
“한스, 어제 뭘 그리 열심히 가방에서 물건을 뺐다 넣었다 했어요?”
헉쓰······. 식은땀이 흘렀다.
“아······ 별거 아니에요. 검이 좀 무거워서 혹시 다른 게 있나 찾아본 거예요. 하하하.”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시 마을에 가면 한스 씨한테 쓸만한 적당한 무기를 같이 고르도록 하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느껴지는 쉐론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뒤로한 채, 우리는 그렇게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 * *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크르르르······.”
피비린내를 풍기며 골목 사이로 튀어나온 것은 블러드 울프 무리였다.
놈들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굶주린 악귀처럼 즉시 돌격해왔고, 찰나의 순간에 사방에서 사지가 찢기는 난전이 벌어졌다.
블러드 울프는 동료가 죽으면 남은 개체들이 더 미쳐 날뛰는 까다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흩어져서 각개격파한다! 우측은 너희가 맡아!”
난전 와중에 레이나가 다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조는 좌측으로, 우리 조는 우측으로 갈라졌다.
마을 건물들이 워낙 넓게 퍼져 있어 적들을 한군데로 모으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무리를 분리해 차근차근 솎아내자는 레이나의 판단은 옳았다.
“하압! 타올라라!”
쉐론이 검에 마법을 실어 불꽃을 뿌렸다.
화염에 휩싸인 블러드 울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갔고, 나는 불길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로 파고드는 놈들을 상대했다.
“으히히! 저리가!”
입으로는 겁먹은 괴성을 내지르면서도,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변칙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확실히 이전에 상대했던 하급 늑대들이나 라킨스프로와는 궤를 달리하는 맷집과 속도였다.
하지만 레이나와 빌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전장의 판도를 뒤흔드는 최악의 변수가 터졌다.
쿵. 쿵. 쿵.
골목 어귀를 가득 메우며 나타난 것은 규격 외의 괴수였다.
일반 늑대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거체를 자랑하는 우두머리, 보스 몬스터 ‘다크팽’이었다.
놈은 시뻘건 안광으로 좌우를 스윽 살피더니, 이내 대지를 울리며 우리 쪽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헉······! 이럴 수가, 왜 다크팽이 여기에······!”
쉐론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이건 무리야. 도망쳐야 해!”
도망칠 타이밍은 진작에 놓쳤다. 다크팽이 미친 듯이 발을 구르며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적인 전투 감각으로 몸을 날려 놈의 돌진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놈은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민가 한 채를 통째로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곧바로 중심을 잡고 다시 들이닥쳤다. 타깃은 나였다.
“안 돼!”
쉐론이 비명을 지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투명한 마력의 벽이 급조되었지만, 광폭화한 다크팽의 진격 앞에서는 한낱 유리창에 불과했다.
콰앙―!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마법 벽이 산산조각 났다. 그 파편 사이로, 전광석화 같은 거대한 흑색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둔탁하게 살점이 파고드는 소리가 들린 것은 찰나였다.
“아, 아아아악!!!”
인간의 비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절규가 쉐론의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왔다.
다크팽의 무지막지한 악력이 실린 발톱은 쉐론의 허리를 그대로 관통해 후벼 팠다.
척추를 제외한 옆구리와 복부의 절반 이상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너덜거리는 살점 사이로 으스러진 갈비뼈와 파열된 내장들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상체와 하체가 고작 한 줌의 뼈마디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야말로 허리가 반쯤 잘려 나간 참혹한 몰골이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크팽의 후속타를 막기 위해 검을 치켜들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어진 놈의 앞발 후려치기에 검이 밀리며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떴고, 뒤에 있던 쉐론의 몸까지 도미노처럼 휩쓸렸다.
쿠웅!
마을 담장에 처박힌 쉐론은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미동조차 없었다.
허리 잘린 단면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검붉은 피가 순식간에 흙바닥을 적셨다.
이대로 두면 10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빨리 최고급 포션을 들이부어야 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사방을 포위한 채 으르렁거리는 늑대 무리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틈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야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망할 놈의 늑대새끼들······.”
낮게 읊조리는 내 목소리에 살기가 맺혔다.
“니들은 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