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상념으로 꼬박 밤을 지새운 나는 동료들과 함께 두 번째 마을을 향해 이동했다.
두 번째 마을도 그리 멀지 않아 반나절 정도가 지나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풍경이 이상했다.
주변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가구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처참했던 이전 마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기가 나는 집 앞으로 다가가 사람을 불렀다.
“계신가요?”
끼익, 낡은 문이 열리며 늙은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군요. 잠시 들어오시게나.”
방 안으로 발을 들이며 빌이 물었다.
“이곳에 혼자 계시는 겁니까?”
“아니요. 아들 녀석이 사냥을 나갔는데,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순간, 쉐론의 눈빛이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레이나 역시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는지, 의구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르신, 이곳은 꽤 오랫동안 방치된 마을인데······ 어떻게 자리를 잡으신 겁니까?”
“본래 우리는 유민이었는데, 1년 전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몇몇 젊은이들 덕분에 마물들도 물러갔지요.
덕분에 지금은 조금 살만해진 상태입니다.”
레이나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며 말했다.
“이곳 분들이 정말 강하시네요. 대단합니다. 이대로라면 마을도 금방 활기를 되찾겠어요.”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마침 목이 마르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어이쿠 감사합니다.”하며 잔을 받았다.
차를 입가로 가져가는데, 쉐론이 계속해서 이상한 눈치를 주고 있었다.
‘왜 저러지?’
하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노인이 말을 했다.
”시장 하실텐데 차만 내놓다니 먹을것 좀 가져오겠습니다. 천천히 드세요.”
노인이 부엌으로 향하자마자 쉐론이 내 팔을 붙잡고 낮게 속삭였다.
“한스! 눈치 좀 챙겨! 그게 무슨 차인 줄 알고 마셔?”
나는 왜 그러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쉐론은 얼굴까지 붉히며 다그쳤다.
“더 마시지 마!”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릿속이 하얘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응? 이거 뭐야?’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빌의 다급한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한스! 정신차려! 한스!”
억지로 눈을 뜨자, 평화롭던 집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목이 날아간 늑대의 사체와 사방에 튄 핏자국.
그리고 절반은 늑대, 절반은 인간의 형상을 한 ‘리칸스로프’ 무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레이나와 쉐론, 빌이 의식을 잃은 나를 중심에 두고 원형으로 서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나는 황급히 칼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쉐론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 멍청아! 내가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우리는 인간의 탈을 쓴 리칸스로프들의 도살장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놈들은 인간을 안심시킨 뒤, 가장 취약한 순간에 목숨을 앗아가는 교활한 포식자들이었다.
동료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나만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반지만 끼지 않았어도 향만으로 독을 알아냈을 것이다.
아니, 마을 입구에서부터 놈들의 역겨운 짐승 냄새를 맡았겠지.
하지만 감각이 일반인이 된 탓인지, 아니면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힘으로 짓밟던 ‘무적의 칼로스’ 시절의 오만한 습관 때문인지, 나는 이 유치한 함정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걸려들고 말았던거다.
칼로스 시절의 나였다면 독극물을 먹었더라도 아무런 타격을 주지도 못했을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뛰어난 회복력 덕분에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보통 인간이라면 몇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을 거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다행히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놈들이 창문과 문으로 들어오는 족족 빌과 쉐론이 깔끔하게 도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길목을 차단당하자 영악한 놈들도 더는 집 안으로 들이닥치지 않고 밖에서 낮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이젠 나가서 싸워야 해요! 제가 전방위 공격 마법을 펼칠 테니 저를 보호해 주세요!”
레이나의 외침과 함께 우리는 그녀를 중심으로 원형 대형을 갖춰 밖으로 나갔다.
레이나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일렁였다.
놈들도 레이나의 마력을 느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못한 채 팽팽한 대치를 이어갔다.
‘딱.’
긴장감 속에 내 발이 나뭇가지를 밟자, 그 소리를 신호로 리칸스로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쉐론이 능숙하게 마검을 휘두르며 놈들을 불태웠고, 빌의 대검은 리칸스로프의 육중한 몸을 종잇장처럼 두 동강 냈다.
나 역시 몰려드는 발톱들을 칼날로 받아냈다.
근력은 형편없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전투감각과 순간 반응 속도가 근육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하게 만들었다.
‘우와악! 오지 마!’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칼을 휘둘렀지만, 사실 내 칼끝은 놈들의 손목과 관절을 아슬아슬하게 쳐내고 있었다.
그렇게 30초 정도가 지났을까.
레이나를 중심으로 거센 회오리가 일더니 사방으로 푸른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광!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달려들던 리칸스로프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미처 벼락에 닿지 않은 남은 녀석들까지 빌과 쉐론이 마무리하자, 마을엔 다시 기분 나쁜 정적이 찾아왔다.
“후우······.”
레이나가 지팡이를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린 동료들의 얼굴에도 그제야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나는 슬슬 녀석들의 눈치를 보며 검을 갈무리에 넣었다. 눈치없이 차를 마신 죄인이 되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쉐론이 검을 털며 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한스! 너 진짜 죽을 뻔한 거 알아? 내가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아, 그게······ 죄송해요. 워낙 목이 말라서 그만······.”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빌이 털털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에이, 쉐론. 너무 뭐라 하지 마. 어쨌든 결과적으로 다들 무사하잖아?
그리고 한스도 정신 차리고 나서는 꽤 훌륭했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에서 레이나 방어를 잘해 줬어.”
“맞아요, 한스 씨. 주문 외울 때 놈들이 달려들어서 아찔했는데, 덕분에 꽤 든든했는걸요?”
“특히 아까 보니까 몸놀림 하나는 기막히더군.
독 기운에 비틀거리면서도 레이나를 향해 날아오는 놈들의 발톱을 용케 막아내더니, 빈틈을 타서 손목을 단칼에 그어버리던데?
너 같은 놈을 보고 타고난 ‘생존가’라고 하는 거야.
그 순발력 하나만큼은 진짜 베테랑 모험가 뺨치더라고.”
빌의 칭찬에 레이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그래요. 지난번 그 도적들을 처치했던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한스 씨, 몸은 이제 좀 괜찮으신 건가요?”
나는 짐짓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하하······ 다행히 제가 마신 차에 독이 적게 들었나 봐요. 다들 절 지켜주신 덕분에 이렇게 멀쩡히 깨어났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겉으로는 바보처럼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투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마을을 정리하며, 우리는 이전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화의 기둥’들을 꺼내 마을 둘레를 따라 박아 넣었다.
마물의 접근을 막는 은은한 결계가 형성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 *
이른 새벽,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곤히 잠든 동료들을 깨우지 않으려 슬며시 집을 빠져나왔다.
기지개를 크게 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의 미안함도 있고 해서,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장작이라도 좀 모아둘 생각이었다.
마을 인근 숲을 거닐며 마른 장작을 줍고 있던 그때, 멀지 않은 냇가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발걸음을 옮긴 그곳에는 쉐론이 씻고 있었다.
순간 나는 넋을 잃고 멈춰 섰다. 쉐론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나?
뜻하지 않게 훔쳐보는 꼴이 되어버린 상황에 자책감이 밀려왔다.
‘이 나이 먹고 참, 주책이다 주책이야.’
고개를 돌려 조용히 물러나려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물기를 털어내며 드러난 쉐론의 귀. 끝이 뾰족하게 솟은 그 귀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
엘프였다.
쉐론이 엘프족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 당황하며 몸을 돌리는데, 아뿔싸. 이 조심성 없는 몸뚱아리는 은신 기술 같은 건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 발끝이 돌멩이를 ‘톡’ 하고 차버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제발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한참 동안 숨을 죽였다.
이윽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느새 옷을 갖춰 입은 쉐론이 서슬 퍼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봤지?”
“아······ 아니, 저기······ 일부러 보려던 게 아니라······.”
내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쉐론이 내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다른 애들한테 말하면 죽인다. 알았어?”
매서운 눈빛이 마치 검날처럼 내 목을 겨누는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엘프는 인간을 혐오하며 좀처럼 숲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파티에 엘프가 섞여 있다니, 그것도 나 혼자만 이 비밀을 알게 되다니.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온갖 경험을 다 겪어본 나였지만, 정체를 숨긴 엘프 미녀에게 멱살을 잡히는 이 상황만큼은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