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스르릉,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흑색 아우라.
온몸을 감싼 흑철 갑옷에서 풍기는 위압감만 보아도 최소 마스터급은 되어 보였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주변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녀석은 레이나 같은 브론즈급 모험가 오십 명, 아니 백 명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야 겨우 쓰러뜨릴 수 있을까 말까 한 존재였다.
하물며 마나 한 톨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지금처럼 하찮은 능력을 지닌 껍데기뿐인 나의 몸으로는 정면 승부에서 승산이 제로에 수렴했다.
이럴 땐 달라는 걸 순순히 주는 게 상책이다. 물론, ‘진짜’ 주는 건 아니지만.
“아, 알겠습니다! 드······ 드릴게요! 제발 목숨만은······!”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처럼 비틀거리며, 겁에 질린 표정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에 끼워진 투박하고 낡은 철 반지를 내보였다.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터질 듯한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정말 끼고 있었군.
너 같은 쓰레기가 힘이 2배로 늘어나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반지에 어울리는 진짜 위대한 주인은 바로 나다. 카카카! 어서 내놔라!”
녀석은 그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오르투스의 반지’라고 확신한 듯, 한치의 의심도 없이 무방비하게 손을 내밀었다.
펼쳐진 녀석의 거친 손바닥 중앙에는 기괴한 마름모꼴의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린 채, 천천히 손가락에서 반지를 떼어냈다.
녀석은 알지 못했다.
이 반지가 힘을 2배로 키워주는 아티팩트가 아니라, 내 안의 해일 같은 힘을 억누르기 위해 채워둔 봉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반지를 뺀다는 게 어떤 파멸을 불러오는지도.
화아아악―!
반지가 손가락 마디를 통과해 완전히 빠져나가는 찰나. 눌려 있던 마나가 심장 내부에서 폭발했다.
그동안 전신을 옥죄고 있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일제히 끊어져 나가는 듯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뇌리를 때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며 폭발적인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나는 녀석의 손 위에 반지를 천천히 올려주면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우지직!
녀석의 손이 내 손에 종잇장이 구겨지듯 완전히 바스러졌다.
“어? 어어어어 억!”
녀석의 입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같은, 끔찍한 비명이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경악으로 물든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까지 ‘사냥감’이라 여겼던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초월적인 압도적 기운.
녀석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천지개벽할 정도로 잘못되었음을, 자신이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를 건드렸음을 깨달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봉인이 풀린 찰나의 폭발적인 기동력은 마스터급 전사의 반응 속도조차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감각 속에서, 오직 나만이 그 멈춘 세계 속에서 주먹을 내질렀다.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신속의 일격. 녀석이 자랑하던 단단한 흑철 갑옷을 통과해 배에 강력한 타격이 내리꽂혔다.
무기조차 쥐지 않은 맨손의 휘두름이었으나, 그 안으로 스며든 충격파는 녀석의 뼈와 내장을 전부 순식간에 파열시켰다.
스우우우······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르르 떨면서 그대로 처참하게 쓰러졌다.
“감당도 못 할 걸···달라고 하긴…”
나는 녀석의 바스러진 손아귀에서 튕겨 나온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생명력이 줄어드는 느낌과 함께 전신의 고통과 두통이 몰려왔다.
“헉..헉···”
아직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나는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붙잡고, 낑낑대며 놈의 시체를 수풀 속으로 던져버렸다.
뒤처리를 끝내자마자 참았던 고통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밀려왔고, 나는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이러다가 10년은커녕 1년도 못 사는 거 아닐까?’
세계수의 묘목에 이어서 오르투스의 반지 , 그리고 칼로스의 유물을 챙긴 자라는 오해까지···
어쩌면 멸망의 씨앗이라 불리는 것들의 상당수가 내 매직백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빌이 거칠게 나를 흔들며 깨웠다.
“한스! 일어나! 연습 좀 하러 간다더니 왜 이리 안 오나 했네. 고작 그거 했다고 지쳐서 잠든 거냐? 이런 데서 자면 진짜 입 돌아간다니까!”
빌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환청처럼 아득했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빌의 어깨에 기대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빌에게 부축받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잠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백 년간 내 매직백 안에는 수많은 유물과 각종 물건이 산재해 있다.
쉐론이 말한 세계수의 묘목을 찾을 겸 지난번에 정리를 해볼까 했지만,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매직백의 이공간은 주인의 능력에 따라 커지는데, 칼로스의 이공간은 너무도 방대했다.
문제는 언제 넣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뿐더러, 어디쯤 들어있는지도 모른다는 거다.
매직백에 보관된 물건은 크기와 관계없이 당구공만 한 투명한 구체로 변환된다.
최근에 넣은 물건일수록 위에 위치하며, 오래된 물건일수록 아래에 쌓인다.
사용자가 최상단 구체를 옆으로 밀어내면 다른 구체들이 순차적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다음 물건이 위로 드러난다.
백 년가량 마구 집어넣은 물건들을 언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다른 건 모르겠고, 틈틈이 세계수의 묘목이나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붙였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상단은 다시 길을 나섰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루미나리스에 도착했다.
과연 왕국의 수도다웠다.
거대한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진 대도시는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어느 왕국이든 수도는 늘 이런 식이다.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왕들의 욕망 때문에, 수도의 크기가 곧 국력을 상징하는 척도가 되곤 하니까 말이다.
도착하자마자 상단주는 우리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무사히 상단을 지켜준 보수를 챙긴 우리는 적당한 여관을 찾아 계약을 마쳤다.
짐을 풀고 잠시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구경도 할 겸 수도의 시장 거리를 걸었다.
■ ■ ■
한편, 한스가 떠나온 숲속.
흑철 갑옷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채 널부러져 있는 후드 사내의 시체 주변으로 일단의 무리가 둘러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리 중 한 명이 시체를 내려다보며 침통하게 물었다.
옆에 있던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르튼 시체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칼로스에 대한 정보를 가지러 간 녀석이 왜 여기서 뼈와 장기가 온통 으스러져 시체로 발견된 거지? 게다가 제르크 무리는 또 왜 몰살당한 거야?”
“흔적을 봐선 제르크 놈들은 이 녀석이 직접 처리한 모양이야. 정보를 독식하려고 먼저 손을 썼다는 소리겠지.”
다른 사내가 바닥을 살피며 서늘하게 덧붙였다.
“문제는 이 녀석의 실력이 우리 중에서도 상위권이라는 거다. 그 견고하다던 흑철 갑옷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됐어. 다른 외상도 없이, 단 한 번의 충격만으로 내장이 통째로 파열돼서 죽었다. 마치······ 칼로스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말이야.”
그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리더격 사내가 낮게 읊조렸다.
“칼로스는 이미 죽었다. 방금 전 길드에서 대대적인 발표가 있었어.”
일순간 무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리더가 부하의 시체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쏟아져 나온 칼로스의 유물 중, 신체를 단단하게 만들거나 무지막지한 충격파를 뿜어내는 유물을 가로챈 놈이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 유물의 힘을 발동해 반격한 거다.”
리더는 차갑게 식은 시체를 걷어차며 혀를 찼다.
“이 멍청한 녀석은 그걸 눈치채고 혼자 독식하려다 역으로 당한 모양이야. 자신을 너무 과신하더니 결국 이 꼴이 되었군.”
어둠의 무리는 시체를 내버려 둔 채, 서늘한 살기를 남기며 숲 너머로 사라졌다.
■ ■ ■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소한 빵 굽는 냄새와 기름에 튀긴 닭 요리 향기 같은 것들을 맡고 있으면 지구와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식재료 면에서는 이곳이 월등히 나은 점도 많다.
내가 한국에서만 살아서 모르는 걸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몬스터를 조리해 먹기 때문에 고기 종류가 훨씬 다양하다.
그 잡내를 잡기 위한 양념 또한 무궁무진하게 발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삶의 기억 때문인지 가끔 ‘김치찌개’가 생각나곤 한다.
이곳에도 매운 음식은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채소를 발효시켜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은 드물다.
아마 이 세계는 상대적으로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굶어 죽는 이보다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는 이가 더 흔한 세상이니 말이다.
시장을 둘러본 우리는 여관 근처 술집에 자리를 잡고 가볍게 잔을 기울였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보게들, 들었어? 드디어 칼로스가 죽었다는군!”
주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인가? 그 천하무적 칼로스가 죽었다고?”
“맞아. 길드에서 조금 전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더라고.”
술집 안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럼 그 소문이 맞나 보네.”
“뭔데? 무슨 소문?”
“아니, 어떤 실력자가 칼로스를 죽이고 녀석의 갑옷과 유물을 통째로 챙겨갔다는 거야.”
“정말이야? 그럼 칼로스보다 더 강한 자가 나타났다는 건가? 그게 말이 돼?”
“단 한 방에 칼로스를 보냈다는 소문도 있어. 새로운 영웅이 나타난 거지!”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을 때, 레이나가 쿡쿡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영웅, 나 왠지 누군지 알 것 같아.”
레이나는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칼로스를 죽이고 갑옷과 유물을 챙겨온 소문 속의 그 남자가 바로 자신 앞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쉐론도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쓱 보더니 속삭였다.
“영웅이시여, 어찌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칼로스를 단칼에 베어 넘긴 비결이 뭡니까? 한 말씀만 해주시죠!”
빌까지 가세해 너스레를 떨었다.
나의 맹한 표정을 본 일행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소문에 소문이 더해져 새로운 영웅담이 창조되는 어이없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