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던전(1)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여관에 다시 모였다.

다들 각자 맡은 보급품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와중에, 빌이 나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한스, 음식 챙기느라 옷 같은 필수품은 다 빼놓고 넣은 건 아니지? 우리도 어느 정도 챙겼으니, 너무 음식만 무식하게 채워 넣는 건 안 좋아.”

내가 가진 매직백의 진짜 용량을 모르는 빌로서는 당연히 할 만한 걱정이었다. 나는 그저 넉살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충분히 다 들어갔으니 걱정 마세요.”

내 매직백엔 옷가지와 장비는 물론이고, 마을 음식점을 통째로 옮겨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식량이 잠들어 있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때 쉐론이 자신의 매직백을 두드리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여분의 무기 일부는 내가 추가로 준비했으니 다들 걱정 마.”

역시 든든한 쉐론이었다.

보급품 준비가 이만하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레이나가 파티원들을 둘러보며 마무리 지었다.

“다들 내일부터 아주 힘든 하루가 될 테니, 오늘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에 봬요.”

팀원들의 얼굴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렇게 우리는 던전 전야의 또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며, 나는 녀석들이 이번 탐색을 통해 부디 한 단계 더 진화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오크웰 던전은 여전히 거대한 구덩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단 초입 부분에서 지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던전의 상층부는 초보 모험가나 일반인들도 자잘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파티원들이 아이언급 이상으로 수련하기 좋은 환경을 찾으려면, 적어도 밑으로 1킬로미터 이상은 깊숙이 내려가야 했다.

초입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모험가들로 북적였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사람들의 흔적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거대한 구덩이 벽면을 따라 나선형으로 이어진 길을 한참 동안 걸어 내려갔다.

그사이 스쳐 지나간 10개가 넘는 던전 입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어느덧 주변에 보이는 다른 파티는 고작 두세 팀 정도에 불과했다.

다음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 혹은 몬스터에게서 값비싼 재료나 희귀한 유물을 얻으려는 자들만이 이 심해 같은 깊이까지 내려오는 법이다.

마침내 우리가 진입할 적당한 입구 앞에 도착했다. 레이나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여기가 적당한 것 같아요. 다들 긴장 늦추지 말고 들어갑시다.”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진입한 파티가 있었던 모양인지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오우거 한 마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전진하자 이윽고 갈래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먼저 간 파티의 흔적이 없는 반대편 통로를 선택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거구의 오우거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거친 발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동시에 우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동굴 내부가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당히 무기를 휘두르며 싸울 정도의 공간은 확보되었다.

“막아선다!”

빌이 파티의 선봉장답게 가장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첫 번째 오우거의 묵직한 일격을 방패로 든든하게 막아내며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그 뒤를 이어 레이나가 마나를 응축해 거대한 파이어볼을 캐스팅했고, 쉐론은 두 번째로 달려드는 오우거를 향해 검에 마비 속성의 마력을 불어넣으며 격렬하게 맞붙었다.

나는 일단 무리하게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쉐론의 측면을 서포트하며 전투를 도왔다.

다행히 전투가 거듭될수록 녀석들은 오우거라는 생물에 빠르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효율적인 공략법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보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동료들은 매일같이 생사결을 치르며 눈에 띄게 전투에 익숙해져 갔다.

휴식을 취하던 중, 나를 유심히 보던 쉐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툭 한마디를 던졌다.

“너도 이제는 좀 전투에 익숙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한스, 눈치 주려는 건 아닌데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우리랑 실력 격차가 벌어질수록 다음 층으로 내려갔을 때 네가 제일 위험해질 거란 말이야.”

“······.”

반박할 말이 없었다.

쉐론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내 침묵에 분위기가 무거워지려 하자, 옆에 있던 레이나가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한스! 한스는 굳이 무리해서 전투하지 않아도 언제까지나 우리의 소중한 파티원이니까요!”

싱긋 웃어 보이는 레이나의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아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녀석들의 실력이 눈부시게 성장하는 동안, 내 육체는 전혀 늘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로 처음에 제약의 반지를 꼈을 때와 단 1그램도 다르지 않게 똑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와 녀석들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들의 능력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것이 이번 던전 탐색의 주된 목적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이 지독하게 빈약한 몸뚱이가 조금은 나아지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몇 번을 피 터지게 구르며 실전 경험을 쌓아도, 이 몸에는 근력이나 체력이 눈곱만큼도 쌓이지 않았다.

역시 제약의 반지를 낀 상태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평범한 하급 워리어 수준에 머무를 뿐이었다.

‘이 녀석들과 계속 발을 맞추려면 나한테도 뭔가 비책이 필요하겠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제는 나에게는 그 어떤 육체 강화 계열의 유물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겉껍데기는 빈약할지언정, 영혼의 알맹이는 이미 완성된 규격 외의 존재인 ‘칼로스’ 그 자체이기 때문에 조잡한 유물 따위는 육체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세상 모든 유물을 매직백에 처박아 두고도 정작 본인은 쓰지 못하다니.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저 착한 녀석들이 단계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동안, 내가 도리어 이들의 발목을 잡는 짐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깊은 층에 위치한 세 번째 던전 입구에 진입했다.

들어가기 직전, 레이나가 조만간 식량이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며 걱정 어린 말을 꺼냈다.

사실 내 매직백 안에는 파티원 전체가 6개월 동안 먹고 자도 끄떡없을 양의 호화로운 식료품들이 처박혀 있었지만, 나는 그저 들키지 않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동조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들 몰래 이동하는 틈틈이 매직백 내부를 부지런히 뒤적거렸다.

쉐론의 말대로 녀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도움은 주지 못할지언정 내 목숨을 건질 비책은 스스로 챙겨야 했으니까.

그렇게 며칠 동안 눈치 싸움을 벌인 끝에, 마침내 쓸 만한 유물 몇 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유물들을 어떻게 등장시키느냐이다.

뜬금없이 내가 가방에서 꺼내 쓰면 녀석들이 백 퍼센트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이번이 오크웰에서의 마지막 던전 탐색이 될 테니, 이쯤에서 녀석들을 위해 준비한 아이템과 내 몫의 장비를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그림을 만들어야 했다.

치밀하게 타이밍을 노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던전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제단 같은 광장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방에서 날뛰는 미노타우르스들을 거의 다 제거해 나갈 무렵, 나는 혼란스러운 전장의 틈을 타 슬쩍 제단 구석 틈새에 준비해 둔 유물들을 밀어 넣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었던 것처럼 정교하게 각도까지 맞췄다.

일부로 모래도 살짝 뿌려놨다.

‘제발 누군가 잘 좀 찾아주렴.’

모든 전투가 끝나고, 나는 부디 누군가 저 눈먼 유물들을 눈치채 주길 간절히 바라며 짐짓 지친 척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다행히도 내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눈썰미가 좋은 빌이 제단 주위를 기웃거리다 눈을 크게 떴다.

“엇! 다들 이것 좀 봐! 여기 이상한 게 숨겨져 있어!”

빌의 외침에 동료들이 일제히 제단 앞으로 모여들었다. 빌이 조심스럽게 꺼내 올린 유물은 총 네 가지였다.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액상이 담긴 병 하나, 정교하게 세공된 귀걸이 하나, 그리고 영롱한 마력이 깃든 작은 반지 하나.

마지막으로 가죽으로 된 신발 한 켤레까지.

슬쩍 눈을 빛내며 먼지 묻은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신발이야말로 오직 나만을 위해 매직백에서 엄선해 꺼내 둔 최고의 생존 아이템이었다.

쉐론이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들어 올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런 형태의 유물은 처음 보는데? 던전 상층부에서 나오던 싸구려들과는 기운부터가 달라.”

녀석들의 안색을 보니, 우리가 여태껏 지나오면서 봤던 흔한 잡템이 아님을 다들 짐작한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짓던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직접 매직백에서 엄선해 온 맞춤형 유물들이긴 한데, 이 허접한 녀석들이 아이템의 쓰임새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실력이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 유물들의 정체로 말할 것 같으면 대략 이렇다.

우선 귀걸이는 마검사인 쉐론에게 최적화된 ‘가속의 에메랄드 스터드 귀걸이’로, 장착 시 반응 속도와 신체 기동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마법과 검술의 연계를 물 흐르듯 이어지게 만들어 주는 명품이었다.

영롱한 빛을 내뿜는 반지는 레이나를 위한 ‘스펠 가속의 루비 반지’로, 마법 시전 속도를 비약적으로 단축해 주는 사기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붉은 액상이 담긴 병은 탱커인 빌의 영구적인 신체 능력을 증강시켜 줄 ‘아틀라스의 정수’였고,

마지막 가죽 신발은 착용자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게 해주는 ‘도망자의 신발’이었다.

마나도 근력도 쓰지 못하는 빈약한 지금의 나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생존 장비는 없었다.

그런데 내 원대한 계획과 달리, 제단 앞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딸기 맛인가? 냄새는 되게 달콤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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