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던전(2)

뜬금없이 쉐론이 빌이 마셔야 할 ‘아틀라스의 정수’의 냄새를 맡고,

그 와중에 마법사인 레이나는 쉐론이 껴야 할 귀걸이를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탱커인 빌은 내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도망자의 신발’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발을 들이밀려 하고 있었다.

아이템과 주인이 전부 거꾸로 매칭되고 있는 대환장 파티였다.

‘아······ 미칠 것 같다, 진짜······.’

저 귀한 유물들을 엉뚱하게 낭비하는 꼴을 볼 생각에 속이 타들어 갔다.

그렇다고 내가 눈을 부릅뜨고 “야! 그건 걔 꺼 아니야!”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타오르는 당혹감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최대한 덤덤하고 침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제가 비록 전투 능력은 형편없지만, 나름 귀족 가문 출신이라 아주 어릴 때부터 물건을 보는 안목만큼은 책을 통해 나름대로 키워왔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고서에서 본 기억을 되짚어가며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내 제안에 레이나가 손뼉을 탁 치며 동조했다.

“맞아요! 출처도 모르는 유물을 그냥 아무렇게나 덥석 사용했다가 저주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요. 우선 한스에게 감정을 맡겨봐요.”

레이나의 단호한 말에 다행히 쉐론도 입가로 가져가던 아틀라스의 정수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물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물약은 병 밑바닥에 새겨진 고대 거인의 문양을 보건대,
영구적으로 신체 능력을 보강해 주는 체력의 비약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 귀걸이는 예전에 어떤 도서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착용자의 반응 속도와 기동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는 ‘가속의 귀걸이’라 들었습니다.

이 반지에 새겨진 룬 문자는 마법 시전 속도를 단축해 주는 마력 계열일 가능성이 높고요.

마지막으로 이 가죽 신발은······ 그냥 가벼운 마력이 깃든 이동용 장화 같네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듯, 나는 애써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 정도까지 떠먹여 줬으면 눈치채겠지 싶었는데,

내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쉐론이 붉은 물약 병을 빤히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어? 듣고 보니 이거 나를 위한 맞춤형 물약이네!
마검사도 체력이 짱짱해야 최전방에서 칼도 휘두르고 마법도 펑펑 쓸 수 있잖아. 안 그래?”

‘······아, 제발 나를 죽여라, 죽여.’

쉐론의 기적의 논리에 뇌정지가 온 내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다행히 파티의 브레인인 레이나가 양손을 흔들며 중얼거리는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진정해요! 한스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 유물들은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적절한 쓰임새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우리 파티의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배하는 게 맞아요.”

레이나가 쉐론의 손에서 슬쩍 물약 병을 빼앗아 빌에게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 체력 물약은 전방에서 우리 파티의 방패가 되어주는 빌이 마시는 게 당연해요.
빌의 맷집이 단단해져야 우리 모두가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이 가속의 귀걸이는 전방과 중거리를 넘나들며 눈부시게 움직여야 하는 쉐론이 착용하는 게 맞겠죠?

마법 반지는······ 제 마법 캐스팅 속도를 올리는 데 쓰도록 할게요.”

레이나의 설득력 있고 깔끔한 교통정리에 빌과 쉐론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똑똑하고 완벽한 분배였다.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다들 주인을 찾아간 유물들을 보며 흐뭇해하느라, 제단 위에 덩그러니 남은 가죽 신발에는 그리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짐짓 조심스러운 어조로 슬쩍 발을 내밀었다.

“음, 다들 임자를 찾았으니······ 이 신발은 일단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제가 착용해도 될까요?

제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쳐야 여러분이 저를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만 집중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것도 그렇네! 한스, 그거라도 싣고 부지런히 도망쳐서 몸 잘 지키고 있어!”

빌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쉐론과 레이나 역시 그게 좋겠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드디어 내 몫의 ‘도망자의 신발’이 완벽하게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겉으로는 그저 머쓱한 표정으로 신발을 받아 들었다.

제단에서의 소동을 마무리지은 우리는 마침내 던전 통로를 거쳐 잠시 출구 근처의 안전지대로 나왔다.

막상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다들 몸이 근질근질한지 제단에서 얻은 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신비한 유물들이 자신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힘을 줄지 너무나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 호기심 가득한 분위기를 포착한 나는 조심스럽게 레이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기, 레이나. 실은 제가 혹시나 해서 마을에서 출발할 때 비상용으로 2주 분량의 식량을 매직백에 더 챙겨두었거든요.

어차피 다들 새로 얻은 유물의 성능이 궁금하신 것 같은데, 밥 걱정은 접어두고 던전 아랫 층에 한 번 더 진입해서 테스트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스! 정말 그런 것까지 넉넉하게 챙겨왔던 거예요?
역시 한스는 우리 파티의 살림꾼이라니깐요!
얘들아, 다들 어떻게 할래?”

레이나의 외침에 빌과 쉐론이 기다렸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방금 얻은 신화적인 장비들을 당장 써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차였으니,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녀석들은 내 철저한(?) 준비성에 감격한 눈치였지만, 사실 내 속셈은 따로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녀석들을 굴려 스펙을 왕창 끌어올려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으니까.

식량 걱정을 완벽히 지워버린 우리는, 새로운 유물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 곧바로 다음 층 던전을 향해 기운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던전에서 우리는 마침내 거구의 외눈박이 괴수, 사이클롭스를 만나게 되었다.

5~6미터 가량이나 되는 압도적인 덩치는 새로 얻은 유물들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에 아주 완벽한 무대였다.

“간다!”

빌이 늘 그러하듯 힘차게 대지를 딛고 방패를 앞세워 진격했다.

아틀라스의 정수를 마시고 체력이 더욱 강화되어서인지, 전방으로 치고 나가는 속도가 내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로 빨라졌다.

쿠웅—!

빌은 거대한 방패로 사이클롭스의 거구를 묵직하게 밀어붙여 단숨에 뒤로 밀려나게 만들었다.

녀석의 괴력에 밀려 비틀거리는 괴수를 보며 빌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칼로스의 안목으로 판단하건대, 지금 빌의 무력은 그야말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은 되어 보였다.

“와, 대박! 힘이 왜 이렇게 넘치지?!”

빌이 제 손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옆에 서 있던 레이나가 손가락 끝에 파르르 정전기를 일으키더니 사이클롭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콰콰쾅—!

스펠 가속의 루비 반지가 빛나며 쏟아지는 마법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내 시선으로도 마법 전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이클롭스는 비명조칠 지를 틈도 없이 연사되는 전격에 정타를 맞으며 사방으로 흔들렸다.

레이나 자신도 본인이 쏟아내는 정신 나간 마법 캐스팅 속도에 꽤 놀란 눈치로 입을 쩍 벌렸다.

그 결정적인 틈을 쉐론이 놓치지 않았다.

가속의 귀걸이 덕분에 신체 기동력이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그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내 눈에는 거의 몸이 번쩍였다 싶더니,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서 딱, 딱, 소리가 나도록 매서운 마법 검격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뿜어진 검풍들은 정확히 사이클롭스의 급소에 조각조각 내리꽂혔다.

이로써 녀석들은 다들 아이언 상급 정도의 능력을 확실하게 갖추게 된 셈이다.

그 일사불란한 연계를 한 발짝 뒤에서 구경하는 내 가슴이 가장 뿌듯하게 차올랐다.

내가 짜둔 기획대로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전력을 다한 공격에 사이클롭스가 굉음을 내며 무너지던 바로 그 찰나였다.

단 한 번도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편하게 구경만 하던 내가 얄미웠던 모양인지, 쓰러지던 괴수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겨냥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회심의 일격으로 제 머리통보다 큰, 1미터는 족히 되는 바위를 내게 냅다 던졌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 상황에 내 귀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앗! 한스, 피해!”

혼비백산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하지만 도망자의 신발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위가 내 머리를 으깨기 직전, 발끝에 강렬한 마력이 전해지더니 순식간에 내 몸이 그 위치에서 마법처럼 지워졌다.

쿠구궁—!

바위가 쾅 소리를 내며 내가 서 있던 벽면을 박살 내는 순간, 나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안전지대에 사뿐히 착지해 있었다.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내 생사를 확인한 빌과 쉐론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방금 봤어? 완전 순간이동이잖아!”

“야, 한스. 그 신발 마음에 쏙 드는데? 나 주면 안 되냐?”

쉐론이 짓궂게 웃으며 농담 조로 툭 던지자,

나는 속으로 ‘이 자식이 내 생명줄을 넘보네’ 하며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어색하게 허허 웃을 뿐이었다.

다들 “오~” 하면서 신기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연신 쳐다봤다.

짐덩이인 줄 알았던 내가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웅장함을 감추며, 그저 운이 좋았다는 듯 뻔뻔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로써 우리 파티는 확실하게 한 단계 진화했다.

더 이상 바닥을 기던 브론즈 언저리의 삼류 파티가 아니라, 당당히 아이언의 중상급 정도에 달하는 파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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