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빛바랜 편지

내 눈으로 직접 이 유물들의 성능을 확인했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앞으로 마주할 웬만한 상대들은 우리를 절대 만만하게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 주 동안 신나게 몬스터를 해치우며 던전을 누볐다.

마침내 던전 입구에서 흘러나온 우리는, 영지에 복귀하자마자 영주가 소개해 준 고급 여관으로 직행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은은한 향이 도는 등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간의 여독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도망자의 신발’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던전에서 직접 써보니 이 신발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요긴했다.

물론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다는 명확한 한계가 있긴 했다.

하지만 순간적인 가속력만큼은 전성기 시절인 칼로스 때의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스릴급 모험가 중에서도 가장 빠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여차하면 이 속도를 이용해 위험에 처한 동료를 낚아채서 빠르게 후방으로 옮길 수도 있을 터였다.

‘······다만, 빌은 너무 무거워서 안 되겠지만.’

덩치 큰 빌을 억지로 들고 뛰다간 내 척추가 먼저 내려앉을 게 뻔했다.

빌은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고, 레이나나 쉐론을 세이브할 때나 써야겠다.
또한, 이 신발의 진가는 아웃복서처럼 치고 빠지는 전략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툭 튀어나오는 기동력으로 적을 사정없이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으니까.

다만, 장기전은 불가능한 내 형편없는 체력이 여전히 문제이긴 했다.

역시 조만간 내 체력을 보강할 꼼수도 하나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수도 루미나리스로 돌아가기 위해, 한 달이 넘는 시간 만에 영주에게 인사를 하러 성으로 향했다.

우리 소식을 들었는지 집무실에서 우리를 맞이한 영주 에반 라이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 드디어 아이언급 파티가 되셨군요! 이제 웬만한 의뢰는 다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주의 진심 어린 칭찬에 빌과 쉐론, 레이나의 얼굴에 흡족한 기색이 가득 찼다.

다들 뿌듯해하는 사이, 나는 에반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영주 부인께서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열심히 살아온 영주가 부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슬쩍 던진 물음이었다.

내 질문에 에반이 안도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이제는 고비를 넘겨 많이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스 씨.”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에반의 아내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분들이 바로 그 고마운 분들이군요.
지난번에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 미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태도에는 아직 약간의 어색함이 남아 있었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도 낯빛만큼은 확연히 좋아져 보였다.

다행히도 우리 파티에게 특별한 적의나 원망은 품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묵직한 한숨이 탁 풀려 나갔다.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레이나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넌지시 화제를 전환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영주님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과거 대륙을 뒤흔들었던, ‘칼로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가요?”

내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컥 삼키며 시선을 슬쩍 피했다.

에반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추어 천천히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예전에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에 들었던 소문으로는······

칼로스가 무슨 유물과 관련된 일 때문에 ‘브린델 왕국’으로 갔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브린델 왕국이라니. 뜻밖의 수확에 레이나가 깊이 감사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정도만 해도 저희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정보입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정보였는지, 에반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렇게 핵심적인 단서까지 손에 넣은 우리는 영주와의 짤막한 면담을 끝마쳤다.

에반과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수도 루미나리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지에 머무는 동안 신세를 많이 졌는데, 떠나는 길마저 에반이 아늑하고 튼튼한 마차를 한 대 수소문해 준 덕분에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루미나리스로 이동할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이동하는 내내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내가 대체 브린델 왕국에는 왜 갔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전생에 하도 굵직한 대형 사고들을 치고 다녔던 터라, 웬만큼 자잘한 사건이나 유물 관련 일들은 머릿속에서 뒤엉켜 잘 기억나지 않는 탓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하필이면 녀석들에게 내가 브린델 왕국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해 뒀단 말이지······.’

내 보잘것없는 신분을 대충 둘러대느라 무심코 뱉었던 가짜 고향.

거짓말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녀석들이 브린델 왕국에 갈려고 한다면 고향 지리를 잘 아는 내 안내만 철석같이 믿고 나를 쳐다볼 게 뻔했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졸지에 브린델 왕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도 도서관에 박혀서 고향 땅에 대한 예습이라도 철저히 해 두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마차 안의 고요한 정적을 깨고 레이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스, 브린델 왕국이라면 한스의 고향이니까 누구보다 잘 알겠네요?
혹시 어릴 때 거기서 칼로스에 대한 이야기나 소문 같은 거 기억나는 거 없어요?”

훅 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아, 그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긴 한데······
그 지독한 악당놈이 왔었다는 소문이 얼핏 돌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나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제발 얼굴에 맺힌 땀이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속도 모르는 빌이 호쾌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를 얹었다.

“하하, 결국 직접 가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겠군!
길 안내는 고향 사람인 한스가 앞장서면 될 거 같고.
브린델 왕국에 도착하면 오랜만에 한스네 고향 집에도 들러서 따뜻한 집밥이나 한 끼 얻어먹자고. 어때?”

집밥은 무슨, 가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허허벌판인데!

그야말로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쫙 흘러내렸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범한 표정을 가장한 채, 속으로는 그저 어버버 대며 대충 고개를 끄덕여 넘길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도착하면 보상금이고 뭐고, 브린델 왕국의 상세 지도부터 구해서 통째로 외워버려야 할 것 같다.

수도 루미나리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문 늦은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일단 숙소를 잡고 다음 날 아침 기사단에 방문하기로 뜻을 모았다.

* * *

이튿날 아침, 우리는 해가 뜨기 무섭게 곧장 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놀랍게도 기사단장이 직접 집무실 밖까지 마중을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는 우리 파티의 노고를 치하하며 나지막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고, 이윽고 묵직한 주머니들을 내밀었다.

정산된 포상금은 각자100골드씩.

한 번에 100골드라니, 예상보다 훨씬 두둑한 액수였다.

주머니를 받아 든 빌과 쉐론, 레이나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뿌듯함과 경탄이 가득 차올랐다.

금빛으로 가득 찬 주머니를 품에 소중히 안은 빌이 싱글벙글 웃으며 쾌활하게 소리쳤다.

“하하하! 이대로만 모으면 깐깐한 귀족 놈들 밑으로 취업하는 것보다 우리가 훨씬 더 빨리 부자가 되겠어!”

얼마나 좋은지 입꼬리가 귀에 걸린 빌은 연신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때, 흐뭇하게 우리를 바라보던 기사단장이 넌지시 레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참, 레이나. 길드를 통해 자네 본가에서 연락이 와 있다더군. 가볍게 넘기지 말고 길드에 꼭 한 번 들러보는 게 좋을 걸세.”

기사단장의 조언을 들은 우리는 지체 없이 곧장 모험가 길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란티어 대륙에서 길드는 단순히 의뢰만 중개하는 곳이 아니다.

통신망이 발달하지 않은 이 대륙에서 길드는 우체국 역할을 대행하거나 물건을 배달하는 등 온갖 물류 작업을 도맡아 처리하는 허브였다.

특히 우리처럼 이곳저곳 정처 없이 대륙을 이동하는 헌터들에게, 길드의 연락망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하고도 유용한 수단이었다.

길드 본부에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우편과 화물을 담당하는 창구로 향했다.

담당 직원은 레이나의 이름을 확인하더니, 두툼한 서류 더미 사이에서 빛바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레이나의 본가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레이나의 손에 쥐어진 편지봉투는 모서리가 다 닳고 꼬질꼬질하게 때가 타서 무척이나 낡아 있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대륙 전역의 길드 지부를 전전하는 헌터의 뒤를 쫓아,
이 편지 역시 수많은 거점을 돌고 돌며 오랜 시간 주인을 찾아 헤맨 탓이리라.

유랑하는 자들을 가족으로 둔 이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 같은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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