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펼쳐 내리던 레이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 차분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대요. 본가에, 본가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일단 브린델 왕국으로 향하려던 계획을 다음으로 미루고, 급히 레이나의 본가가 있는 ‘아스란 왕국’으로 기수를 돌렸다.
우리가 있는 수도 루미나리스에서 아스란 왕국까지는 대륙 동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상당한 거리였다.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열심히 달린다 해도 꼬박 보름은 가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아스란 왕국은 과거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하고 몰락했던 ‘아스란 제국’의 터전 위에서 다시금 일어선 나라였다.
제국의 뼈대 위에 세워진 덕분인지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 그 영토와 규모는 웬만한 대국들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점은 레이나의 고향이 머나먼 왕국 수도가 아니라 국경과 비교적 가까운 변두리 영지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갈 길은 멀었지만,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사색이 된 레이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차의 마부석을 번갈아 잡아가며 이동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로 했다.
사실 내 아공간 매직백 안을 이리저리 잘 뒤져보면, 이까짓 대륙 횡단쯤은 단숨에 단축해 버릴 수 있는 초인적인 이동 계열 유물이 한두 개쯤은 분명 처박혀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걸 덜컥 꺼낸다 한들, 이 순진한 동료들에게 도대체 무슨 수로 납득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줬다’고 하기엔 너무 터무니없는 신화급 물건들이라, 의심을 받기 딱 좋았다.
그냥 마차로 묵묵히 이동하는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엉덩이가 진물이 나도록 마차를 타고 달리는 기나긴 고행의 시간 끝에, 우리는 마침내 레이나의 고향인 아스란 왕국의 국경지대, 리버포드 변경 영지에 도착했다.
거대한 제국의 흔적이 남은 땅답게, 변방임에도 불구하고 육중하게 솟아오른 성벽과 리버포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지를 관통하며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고향 땅을 밟은 레이나의 안색은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우리는 영지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그녀의 본가를 향해 마차를 채찍질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려 리버포드 변방의 한적한 농경지 사이에 자리 잡은 레이나의 생가에 도착했다.
낡았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평범한 2층짜리 목조 주택이었다.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린 레이나가 다급하게 집 문을 거칠게 밀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아빠! 할머니······!”
절박함이 가득 섞인 침통한 외침이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러자 2층 계단 위에서 레이나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황급히 내려왔다.
그녀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는 딸을 발견하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왔다.
“레이나! 아이고, 왜 이제야 왔니······!”
“어머니, 할머니는요?
할머니는 어떻게 되신 거예요?”
레이나가 애타게 묻자, 레이나의 어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많이······ 많이 위독하셔.
‘폐병’이라 의원 말로는 오늘 내일 하시는 마당이라 곧 돌아가실 것 같구나.”
그 비극적인 말에 우리 파티원들 역시 무거운 침묵 속에서 레이나의 가족을 따라 1층 안쪽에 위치한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60대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얇은 이불을 덮은 채 힘겹게 마른기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곁을 지키고 있던 레이나의 아버지가 침상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떨리는 손으로 레이나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돌아왔구나, 내 딸······. 그래도 길드 편지가 아주 늦게 닿지는 않아서 임종 전에 얼굴을 보는구나.”
레이나의 아버지 역시 눈물을 그렁이며 딸의 등을 토닥였다.
레이나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침상 곁으로 다가 가 노인의 마른 손을 꼭 쥐었다.
“할머니, 저예요. 레이나가 왔어요.”
그러나 침상 위의 노인은 초점 없는 흐릿한 눈동자로 레이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냘프고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누구······ 누구세요······?”
“할머니······?”
늘 자신을 아껴주던 할머니의 낯선 반응에 레이나가 서러움과 당황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레이나의 아버지가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설명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치매 증세가 시작되셨단다. 지금은 정신이 완전히 흐려지셔서 우리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시는 상태야.”
방 안은 순식간에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하고도 슬픈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침상에 누워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던 노인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내 얼굴에 뚝 멈춰 섰다.
그리고 순간, 노인의 흐릿했던 눈동자가 기적처럼 깊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떨리는 두 손을 허공으로 뻗어 나를 향해 내밀며, 아주 어릴 적 기억 속 가장 그리운 존재를 부르듯 애틋하게 조잘거렸다.
“······아빠? 아빠······.”
“······!!”
순간 내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헉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60대 노인의 입에서 나온 청천벽력 같은 단어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당사자인 나도, 눈물을 흘리던 레이나도, 그리고 레이나의 부모님마저도 이 황당하고 기이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레이나의 아버지가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하아, 정신이 흐려지시니 이제는 평생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던 아버지를 찾으시는구나. 젊은 헌터 분을 보고 뇌리에 박힌 막연한 그리움이 투영되신 모양입니다.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레이나 아버지가 서둘러 수습한 덕분에 상황은 겨우 정리되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잠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방을 나서는 그 와중에도, 침상 위의 노인은 줄곧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진짜 자신의 아버지를 애타게 붙잡으려는 듯한 그 간절한 눈빛이 유독 신경 쓰였다.
방 문이 닫히고, 통로 한구석에서 끝내 무릎을 꺾고 소리 없이 오열하는 레이나를 본 순간 마음이 묵직해졌다.
여기까지 함께 고생하며 온 동료가 저렇게 찢어지게 슬퍼하는 꼴은 그리 보고 싶지 않았다.
내 아공간 매직백 안을 샅샅이 다 뒤져보진 않았지만, 어떠한 병이든 단숨에 되돌려놓는 기적의 영약 ‘엘릭서’는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대륙을 통째로 준다 해도 구할 수 없는 신화급 신약이기에 결코 흔한 물건도 아니었고,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위기를 생각하면 눈앞의 정에 이끌려 함부로 남용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영약이라면 무조건 치유가 가능하겠지만,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번 쉐론이 죽어갈 때 사용했던 하이포션 같은 약물은 이런 병에는 전혀 듣지 않는다.
포션은 어디까지나 외상이나 파괴된 육체를 수복하는 물건일 뿐, 몸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병원균이나 치매 같은 인체의 노화 현상까지는 어떻게 처리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내가 그렇게 소리 없는 고뇌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레이나의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머니가 정신이 온전하실 때 가끔 말씀하시던 ‘실버문’’이 있다면 어머니의 치료가 가능할 텐데······.”
아버지가 절망 섞인 혼잣말을 뱉어내자, 옆에 있던 빌이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나섰다.
“저희가 어떻게든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호기로운 외침에 레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빌을 만류했다.
“빌,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실버문은 전 세계에서 오직 이곳, 리버포드 남쪽에서만 자생하던 희귀한 식물이거든.
유일하게 폐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오지만······.”
레이나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무겁게 말을 받았다.
“지금은 구하러 갈래야 갈 수가 없는 금단의 땅이 되어버렸단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주변을 끔찍한 ‘악령의 숲’이 뒤덮기 시작하더니, 숲이 점점 팽창해서 이제는 도저히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되었어.”
“맞아요.”
레이나가 아버지의 말에 동조하며 덧붙였다.
“아주 오래전에는 왕가의 딸을 구하겠다던 실력 있는 미스릴급 파티가 그 숲에 도전했다가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대요.
그러니까 빌,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줘.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방 안을 가득 채운 노인의 거친 기침 소리, 그리고 손수건에 묻어 나오는 핏빛 섞인 걸쭉한 가래.
‘······폐결핵이군.’
노인의 증상을 가만히 관찰하던 내 머릿속에 병명이 떠올랐다.
결핵.
지구에서라면 현대 의학의 약물 치료를 통해 충분히 완치될 수 있는 질병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곳 아스란티어 대륙에는 결핵을 완벽히 치료할 만한 마법이나 신약이 아직 대중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대륙의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한다는 이 폐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그레이트 메이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