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쉐론과 나는 잠시 정들었던 리버포드를 떠났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탁 트인 큰길로 나설 때쯤, 나는 옆에서 걸어가는 쉐론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쉐론?”
그 순간, 쉐론이 걷던 걸음을 뚝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사납게 째려보았다.
“이 자식이 이제 말을 놓네? 내가 나이가 몇인데. 나 82세야, 82세! 어디서 파릇파릇한 인간 꼬맹이가 반말이야?”
“······.”
그래, 그래.
오구오구······ 귀여운 녀석.
103세 먹은 인간 할아버지 앞에서 겨우 82세밖에 안 된 애송이가 나이 부심을 부리는 꼴이라니.
속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애써 눌러야 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자, 쉐론은 짐짓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훗’ 하고 전형적인 엘프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그 험한 숲에서 생사를 같이한 사이인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어. 그냥 편하게 말 놓자. 특별히 허락해 줄게.”
치사해서 반말 안 쓴다, 안 써.
겨우 82세밖에 안 된 꼬맹이 녀석이 대단한 시혜라도 베푸는 것마냥 턱을 치켜드는 꼴을 보니 속으로 살짝 삐져버렸다.
백 년 넘게 산 대선배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는 입을 삐죽이려다 겨우 참아내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닙니다. 전 그냥 하던 대로 존댓말을 쓰는 게 편하네요, 쉐론 님.”
내가 일부러 ‘님’ 자까지 붙여가며 선을 긋자, 쉐론은 제 딴에는 배려해 줬는데 거절당한 게 멋쩍은지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해댔다.
“세계수의 묘목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칼로스의 흔적부터 쫓아야 할 것 같아.”
잠시 말을 멈춘 쉐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원정대에 합류했을 때, 칼로스가 사라진 자리에는 온갖 유물들이 뒹굴고 있었잖아.
원정대가 그걸 회수할 때 내가 옆에서 샅샅이 확인해 봤거든. 하지만 그 수많은 유물 중에 세계수의 묘목은 없었어.”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결국 녀석이 다른 어딘가에 흘렸다는 소린데······
하아, 어쩔 수 없지. 여전히 칼로스의 남은 행적을 뒤쫓으며 다른 단서를 찾는 수밖에.”
말을 마친 쉐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군요. 쉬운 길은 아니겠어요.”
겉으로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동조해 주었지만, 사실 속속들이 골치가 아파오는 건 나였다.
‘······그놈의 세계수의 묘목.’하지만 매직백을 뒤져서 용케 찾아내더라도, 아주 나중에 건네줄 생각이다.
한 8년 후쯤······?
지금 덜컥 묘목을 찾아 줘버리면 목적을 달성한 이 엘프 녀석이 냉큼 내 곁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내 아는 유일한 동료이자, 앞으로 나를 든든하게 서포트해 줄 이 녀석이 나를 버리지 못하게 만들려면······
묘목이라는 미끼를 최대한 오래 쥐고 있어야 한다.
‘미안하다만, 한 8년만 나랑 더 고생하자꾸나.’
내가 속으로 이런 흉계(?)를 꾸미며 음험하게 웃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쉐론은 그저 무거운 표정으로 아득히 이어진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슬쩍 운을 떼며 쉐론에게 말했다.
“레이나가 그랬듯이, 아무래도 왕국의 수도에 가장 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모여 있을 것 같아요. 일단 수도부터 한번 들러보죠.”
내 제안을 가만히 듣던 쉐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브린델 왕국은 별로야? 거기도 꽤 큰 단서가 있을 텐데.”
“······.”
아니, 왜 또 거기서 브린델 왕국 이름이 튀어나오는 건가.
거긴 정말······ 나중에, 아주아주 나중에 가자.
내가 한 거짓말이 다 들통나지 않는가. 거기 가봐야 아무것도 없다고······!
속으로는 기겁했으나 겉으로는 들키지 않아야 했다.
나는 얼른 침착한 표정을 가장하며, 쉐론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칼로스가 갔다는 브린델는 너무 오래전 아닐까요? 엘프숲에서 그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갔던 시기와는 좀 멀지 않나요?”
“어······? 듣고 보니 그렇네? 녀석이 찾아온 게 2년 전쯤이니······.”
내 날카로운 지적에 쉐론이 눈을 크게 뜨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브린델로 가려면 아스란 왕국의 수도를 지나가야 하잖아요.
그러니 우선은 가장 정보가 많고, 방금 말씀하신 2년 전이라는 시기상으로도 이곳 왕국의 수도를 거쳐 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먼저 수도부터 들러서 칼로스의 행적을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죠.”
쉐론은 내 완벽한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한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백번 맞아! 시기상으로 보면 수도 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겠어. 당장 수도로 가자!”
“그러죠, 쉐론 님.”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우리는 한 달은 족히 가야 하는 수도를 향해, 첫 경유지인 벨하임 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마차 대신 굳이 걸어서 이동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 확실한 단서가 없는 상황인 데다, 수도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 칼로스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벨하임 영지까지 가는 길 역시 꽤나 먼 거리였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적당한 냇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쉐론이 나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넌, 굳이 나를 안 따라와도 됐잖아. 왜 따라온 거야?”
그야······ 내 파티가 해체된 마당에 칼로스의 행적을 추적하려면 엘프만 한 인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때 안 따라오면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노려봤잖아, 네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속마음을 꿀꺽 삼키며, 나는 얼른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이, 왠지 쉐론 님을 쫓아다니면 돈이 꽤 될 것 같아서요. 하하하.”
그러자 쉐론이 미간을 좁히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하, 참 나······. 지금까지 네가 모은 돈 정도면 귀족으로 복귀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아직도 그렇게 돈이 탐나냐? 그리고······.”
쉐론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흐렸다.
“······내가 엘프라는 신분을 이용해 나를 협박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 뜬금없는 경계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당하다는 듯 받아쳤다.
“제가요? 왜요, 저 죽을 일 있어요?”
내 너무나도 진심 어린 반응에 쉐론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쩍쩍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말이 안 되긴 하네.”
쉐론은 민망한지 모닥불만 탁탁 장작으로 쑤시다가, 슬쩍 내 눈치를 보며 툭 던지듯 말을 보탰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쉐론 님, 쉐론 님 하는데 그러지 마라. 불편하니까.”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메고 있던 매직백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두 사람이 쓸 침낭을 부지런히 빼내어 자리를 깔았다.
그렇게 야영지의 밤이 깊어가고, 우리는 각자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새벽녘쯤이었을까.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스산한 기운에 번쩍 눈이 떠졌다.
슬그머니 눈꺼풀만 들어 올렸는데, 저편 침낭에 누운 쉐론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이 야심한 새벽에······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건가?’
쉐론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녀석의 입술이 소리 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도 휙휙 돌리며 주변 어둠을 가리키는 중이었다.
그제야 나도 눈알을 굴려 주변을 훑었다.
역시나. 불 꺼진 모닥불 주변으로 낯선 기척들이 은밀하게 좁혀오고 있었다.
다행히 내 손끝에는, 무기를 항상 몸에 가까이 두라던 쉐론의 잔소리 덕분에 미스릴 검이 딱 맞닿아 있었다.
쉐론이 나를 보며 눈을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나도 곧장 눈을 깜빡여 신호를 보냈다.
과거 던전에서 구르며 뼈저리게 맞추었던 우리만의 위기 상황 연계 전략이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타이밍을 맞춘 순간, 우리는 동시에 침낭을 날려버리며 검을 쥐고 튕기듯 일어섰다.
기습조가 당황해 주춤하는 사이, 어둠 속에서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아쉽구만. 좀 더 깊이 잠들었어야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을 따는 건데 말이야.”
흉흉한 칼날을 번뜩이는 꼴을 보니 딱 봐도 도적 놈들이었다.
쉐론이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차갑게 내뱉었다.
“분위기 참 좋았는데 말이지. 감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들의 잠을 깨운 대가는······ 너희들의 목숨으로 받겠다.”
속으로 ‘아니, 뭔 뜬금없는 삼류 대사냐······.’
싶었지만, 어쨌든 나도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일단 강자가 앞에서 날뛰어줘야 내가 뒤에서 편하니까.
도적 무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하지만 던전을 돌며 진작에 ‘룬 나이트급’으로 물이 오른 쉐론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재롱잔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런 조무래기쯤이야’라는 거만한 표정으로, 쉐론이 검에 시푸른 마력을 담아 거칠게 횡을 그었다.
서슬 퍼런 마검술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도적 한 놈의 몸뚱이가 반 토막 나며 나뒹굴었다.
그 화려한 쇼를 보며, 나는 늘 그러하듯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취했다.
내 마음과 달리 이러한 자세가 취해지는 내 모습은 남을 속이기엔 딱이었다.
내가 세상 만만해 보였던 놈 하나가 기합을 넣으며 내 가슴팍으로 칼날을 찔러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슈욱!
내 모습이 그 자리에서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어, 어라? 어디 갔어?!”
놈들이 어리둥절해하며 허공을 두리번거릴 때, 나는 이미 녀석의 등 뒤에 안착해 있었다.
이놈들아, 이게 바로 내가 고른 최고급 사기 아이템 ‘도망자의 신발’의 위력이다.
거의 워프 하듯 사각을 잡은 나는, 검의 궤적을 바닥까지 낮춰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깊숙이 그어버렸다.
서투른 척 연기하다가 확실하게 뒤통수를 치는 것.
이게 바로 약자인 내가 살아남는 최고의 잔재주이자 살생법이었다.
서너 놈이 순식간에 발목이 잘려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자, 도적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공포가 그들의 얼굴을 지배했다.하지만 이딴 짓을 일삼으며 무고한 행인들을 약탈해 왔을 쓰레기들이었기에, 우리에게 자비 따윈 사치였다.
“네 녀석들에겐 자비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