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연구일지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는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지칠 대로 지친 내 마음속에서, 저 새끼를 그냥 확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는 일단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칼로스에 대한 언급이 있어 들키면 골치 아파질 메모리얼 크리스탈은 이미 내 매직백에 챙겨 두었으니 이곳엔 없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실험실 구석구석을 탐색하였고, 나는 어제 챙겨 두었던 시리아의 연구 일지를 슬쩍 지금 막 찾은 척 연기를 시작했다.

“쉐론, 빌! 여기 연구 일지가 있어!”

내가 처음 발견한 마냥 소리치자, 쉐론과 빌이 기뻐했다.

역시 경험이 많은 엘프답게 쉐론은 복잡한 연구 일지인데도 실버문의 배합법을 순식간에 파악하더니, 그 자리에서 능숙한 손길로 약물을 달여내기 시작했다.

내가 한 짓을 또 그대로 하고 있다니······.

나는 피곤에 쩔어 한구석에 쉐론이 일을 마무리하길 기다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자 빌이 나를 깨웠다.

“한스! 일어나! 어떻게 맨날 아무 데서 잠을 자냐! 어서 가야 한다구!”

그래, 일어난다······. 아, 피곤하다.

우리는 서둘러 약물과 혹시 몰라 실버문을 하나 더 챙기고 연구 일지를 챙겨 레이나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걸음에 달려 레이나의 집에 도착했다.

“어······?”

문을 열자마자 나와 빌, 쉐론은 동시에 얼이 빠진 소리를 냈다.

나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 죽어가던 레이나의 할머니가 마당에서 정원 꽃에 물을 주고 있었고, 그 주변에서 레이나와 레이나의 부모님이 아주 당황스러운 얼굴로 할머니를 말리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아유, 난 정말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머니, 그래도 아침 전까지 앓아누우셨는데 쉬셔야죠.”

레이나 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하며 안으로 이끌려 하자, 할머니는 오히려 정정하게 허리를 펴 보였다.

“아니라니까? 지금 내 몸 상태는 아주 50대 시절처럼 팔팔하다니까!”

우리가 마당 한구석에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자, 그제야 우리를 발견한 레이나가 굉장히 기뻐하는 얼굴로 달려와 우리를 반겼다.

“빌! 쉐론! 한스! 밤새 기적이 일어났어!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셨다고!”

‘······알고 있어. 내가 새벽에 약 먹이고 갔으니까.’

나야 전부 알고 있던 결과였지만, 어쨌든 씁쓸한 입맛이 다셔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침부터 점심까지 헛다리를 짚으며 단체로 개고생을, 아주 거하게 생쇼를 한 셈이었다.

목숨을 걸고 금단의 땅에 다녀왔다는 비장함에 가득 차 있던 빌과 쉐론의 얼굴이 급격하게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일단 할머니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악령의 숲 깊은 곳에서 그레이트 메이지 시리아의 연구실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발견한 연구 일지와 실버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그 연구 일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일지를 품에 안은 할머니의 눈가에 붉은 눈물이 고였다.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연구 기록이 맞구나.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기억이 제대로 안 났는데, 어머니가 세상을 위해 실버문을 연구하셨던 게 맞았어.”

일지를 함께 들여다보던 레이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게다가 연구를 완벽하게 완성하셨어요! 할머니, 이거 모험가 길드에 알려지면 대격변이 일어날 거예요!”

레이나의 말이 맞았다.

이 연구 일지를 길드에 정식으로 보고하면, 유일한 혈육인 레이나의 가족이 이 위대한 연구에 대한 독점 소유권을 갖게 된다.

대륙의 모든 폐병 환자를 고칠 수 있는 영약의 배합법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레이나의 가족은 조만간 이 아스란 왕국에서 손에 꼽히는 최고의 부호가 될 터였다.

어머니 시리아가 세월을 뛰어넘어, 마침내 자신의 딸과 후손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준 셈이었다.

“······.”

눈물 흘리는 딸 실리와 감격에 겨워하는 후손들을, 나는 먼발치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물론 망나니 아빠인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수십 년 만에 기어 돌아와서 숲을 가로막고 있던 ‘리치’ 하나 치워준 게 전부였다.

그게 내가 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레이나, 그리고 레이나의 아버지.

이제 와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니, 이 눈앞의 아이들이 모두 내 핏줄이고 내 자손들이었다.

내가 천하를 호령하는 칼로스로 살아가며 외면했던 나의 침묵 속에서, 이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삶을 버텨왔던 걸까.

그들이 살아온 모진 세월이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서, 가슴 한구석이 짓눌린 듯 아득한 죄책감으로 물들어갔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역시나 야무진 레이나답게 처리가 아주 깔끔했다.

레이나는 즉시 길드에 이 내용을 보고했고, 왕국을 넘어 온 세상에 이 약초 배합법이 널리 알려지도록 손을 써 두었다.

아직 실버문의 자생지가 시리아의 연구실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어 대량 생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머지않아 이 위대한 비법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퍼져나갈 터였다.

길드 측에서는 대륙을 뒤흔들 이 거대한 사건을 하루라도 빨리 수도에 알리겠다며 사색이 되어 움직였다.

그 후로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레이나는 가족들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우리 역시 간만에 피로를 씻어내며 평온한 일상을 만끽했다.

그리고 마침내, 왕국에서 보낸 특사가 리버포드 마을에 당도했다.

왕국의 특사는 내 딸 실리에게 머리를 숙였다.

대마법사 시리아를 대신해 폐병의 완치법을 세상에 내놓은 그녀의 커다란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특사는 왕실의 이름으로 엄청난 상금을 하사했고, 시리아의 연구실을 중심으로 악령의 숲 전체를 레이나 집안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문서를 전달했다.

막대한 자금과 영지까지. 이로써 평범하기 그지없던 레이나 집안은 순식간에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엄청난 대부호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게 집안에 기쁜 일들이 연이어 터지며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시리아의 연구 일지를 밤낮으로 매달려 읽던 레이나 가족이 뜻밖의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며 우리 일행을 불렀다.

레이나가 심각한 얼굴로 일지의 마지막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이 연구를 세상에 꼭 알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록을 읽는 자에게 경고합니다. 손바닥에 네모 모양의 문신이 있는 자들을 조심하세요. 위험한 자들입니다.”

일지를 덮은 레이나가 우리를 돌아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지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 아무래도 너희들도 이 사실을 꼭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

“······.”

레이나의 입에서 나온 그 경고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가 친 듯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어라······?’

네모 모양의 문신.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자 소름 끼치는 연결고리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나를 유물 도둑취급하며 대책 없이 덤벼들었던 그 정체불명의 사내, 그리고 오크웰에서 마주쳤던 난폭한 블러드 그런트 베어······.

똑똑히 기억한다.

놈들의 손바닥에 분명히 기분 나쁜 네모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조차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세력. 대륙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악의 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여전히 음지에서 암약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나와 무슨 사연으로 얽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의 모든 칼끝은 오로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노린 자들이라···’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깨달음이 요동쳤다.

이로써 과거에 신이 나에게 말했던 그 놈의 ‘업보’가, 무엇을 뜻하는지 좀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내가 한스로 살아가며 직면해야 할 진짜 운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놈들의 정체를, 반드시 내 손으로 파헤쳐주마.

레이나 가문이 점차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어느 날, 마침내 떠날 때가 되었다고 느꼈는지 쉐론이 모두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레이나, 나는 이제 떠나야겠어. ······한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쉐론의 눈빛에는 묘한 구속력이 담겨 있었다.

유일하게 내가 엘프라는 사실을 아는 그녀가, 나를 이대로 혼자 세상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일종의 감시이자 속박하려는 의도였다.

‘안다, 이 녀석아. 내가 네 곁을 벗어날 생각이나 하겠냐.’

어차피 칼로스라는 걸 철저히 숨기고 인간들 틈에서 한스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다.

얼마전에 알게된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네모 문신의 조직’을 추적하기 위해서라도, 유일한 동료를 두고 굳이 딴 길로 샐 이유는 없었다.

나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쉐론이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면, 따라갈 생각이었어요.”

내 답변에 쉐론이 만족스러운 듯 나직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빌은 안절부절못한 채 레이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언젠가 이 날이 올 거라 예상했던지, 레이나가 씁쓸하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는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아.
다들 알다시피 지금 우리 집안에 너무 큰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당장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거든.”

레이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빌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나, 나는 레이나 옆에 있고 싶어!”

빌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부끄러워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 순수한 고백에 레이나는 고맙다는 듯 따스한 눈빛을 빌에게 보내주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비록 함께하는 여정은 여기까지였지만, 아쉬움보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나와 쉐론은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축복을 빌어주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의 가족에게 안녕을 빌어주고, 우리는 다가올 새로운 운명을 향해, 다시 한번 길을 떠났다.

마침내, 나의 첫 파티였던 ‘스로칼’ 파티는 이름만 남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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