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아아아악―!
봉인이 풀리는 순간, 뼈마디 마디와 피부의 모든 숨구멍을 타고 억눌려 있던 칼로스의 진정한 마력과 무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장난치듯 웃어대던 리치의 안광이 거칠게 흔들렸다.
놈이 본능적인 죽음의 위기를 직감하고 비명을 질렀다.
《 이, 이 기운은······?! 위험하다! 막아라! 당장 막아라!! 》
리치의 명령에 해골이 된 시리아가 마법을 전개하고, 미스릴 파티의 언데드들이 광기에 사로 잡혀 나를 향해 덮쳐왔다.
가장 먼저 쇄도한 것은 대검을 든 선봉장이었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놈이 대검을 쥔 팔을 통째로 뽑아내었다.
그리고 그 팔에 쥐여 있던 대검을 빼앗아 단숨에 놈의 몸통을 두동강 냈다.
“감히 누구의 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거냐!”
뒤이어 덤벼드는 다른 파티원들을 향해, 빼앗은 대검에 극도로 응축된 마력을 주입해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마력의 참격이 폭발하며 전방의 적들이 형체도 없이 뼛가루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은 허공에서 손으로 가볍게 밀어내 되돌려 보냈다.
음속을 돌파한 화살들이 궁수들의 목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그때, 뒤쪽에서 거대한 풍압과 함께 매직 나이트급 해골이 급습해 왔다.
나는 오른발로 대지를 쿵, 하고 강하게 내리찍었다.
구구구구궁―!
지면이 거대하게 요동치며 날카로운 돌기둥들이 솟구쳤다.
공중으로 날아 오른 매직 나이트를 향해 대검을 풀스윙으로 후려쳤다.
쿠웅―!
휘둘러진 대검에 얻어맞은 매직 나이트의 몸뚱이가 대포알처럼 무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뒤쪽의 언데드 군단을 사정없이 짓이겨버리며,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숲을 가득 채우고 있던 대열에 커다란 고속도로가 뚫렸다.
그 직선의 옆에서 해골이 된 시리아가 거대한 뼈의 방벽을 쌓아 올리며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소용없다.”
마력이 깃든 대검을 방벽을 향해 가볍게 투척했다.
“콰과가가강!”
대검이 방벽의 중심을 꿰뚫으며 길을 열자, 나는 시공을 찢는 듯한 속도로 틈을 향해 돌진했다.
폭풍에 휩쓸린 듯 뼈의 방벽이 흔적도 없이 박살 났다.
“쾅!”
시리아의 유골을 스쳐 지나친 내 손끝은 어느새 리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다.
《 커억! 》
《 안······ 안 돼!!! 》
리치가 경악에 질려 단말마를 내뱉었다.
“네놈의 세상은 이제 끝이다. 다시 잠들거라.”
손아귀에 힘을 주어 리치의 왕관과 머리를 통째로 뽑아 분리해 버렸다.
이어서 가슴팍을 사정없이 꿰뚫어, 놈의 본질이자 불사의 원천인 ‘죽음의 심장’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퍼어어억―!
마력을 폭발시키자 심장이 진흙처럼 으깨졌다.
그와 동시에 나를 공격하려던 해골 시리아를 비롯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천수만의 언데드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마법의 지배 고리가 끊어진 탓이었다.
바스스스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그대로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하얗게 타버린 뼛가루가 마치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며 숲을 뒤덮었다.
지독했던 오염이 걷히고, 모든 상황이 끝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뽑아두었던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힘의 대가로 밀려오는 지독한 통증이 골수를 찔렀다.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몇 번이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핏물이 배어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흐려지는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은 채, 시리아의 연구실을 향해 한 걸음씩 무거운 발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남은 연구실 한가운데서, 60년 만에 되찾은 딸과 옛 연인의 흔적을 가슴에 묻으며 조용히 숨을 헐떡였다.
어느 정도 전신의 통증이 잦아들 무렵,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시리아가 남긴 연구 자료를 펼쳤다.
그 안에는 수천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제조 공정이 그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 최적의 추출 조건과 정제 공정, 안정화 비율까지 검증이 끝난 상태였기에, 내가 할 일은 연구가 아니라 공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뿐이었다.
가장 상태가 좋은 실버문을 채취한 뒤, 세월의 흔적에도 멀쩡한 실험 장비를 사용해 기록된 순서대로 제조를 진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을 종식시킬 정제 액체 약물이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먼지가 가득 쌓인 시리아의 친필 연구 일지를 품에 소중히 챙겨 들었다.
이것만큼은 꼭 실리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딸로서 알 권리가 있고, 이 연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폐가를 나섰다.
리치가 소멸한 악령의 숲은 거짓말처럼 고요했고, 나무들 사이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젖어 들고 있었다.
나는 유물 ‘어둠의 망토’를 사용하여 완벽하게 기척을 지운 채, 실리가 누워 있는 방으로 은밀하게 들어갔다.
스스슥―.
어두컴컴한 머리맡.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위태로운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60대의 노인, 내 딸 실리가 보였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정성스레 달여온 실버문 약물을 입술 사이로 천천히 흘려 넣어주었다.
영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괴롭게 들끓던 노인의 호흡이 이내 눈에 띄게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가만히 허리를 숙여, 평생 아비의 온기를 모르고 모진 세월을 버텨왔을 내 딸의 주름진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잘 버텨주었구나, 내 딸아.”
방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어둠의 망토를 완전히 거두고 유유히 빠져나온 나는, 여관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일 눈을 떴을 때는, 실리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환한 미소로 레이나와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기를 바라며.
나는 기분 좋은 피로감 속에서 드디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 잠들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한스! 한스! 일어나, 비상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쉐론이었다.
어제 그 난리를 쳐서인지 전신이 무거웠다.
나는 채 가시지 않은 피로감에 눈을 찌푸리며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켰다.
“으음······ 무, 무슨 일입니까?”
“빌이 없어졌어! 그 멍청한 녀석이 새벽 사이에 사라졌다고!”
“······예?”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멀어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서둘러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쉐론을 따라 여관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이미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는 활기찬 아침 거리였지만, 쉐론의 얼굴만큼은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달리는 와중에 쉐론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바보가 악령의 숲으로 간 것 같아! 어제 레이나의 할머니를 보더니,
자기가 어떻게든 실버문을 구해오겠다며 밤새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더니만······!”
“서두르자! 한스! 아침 일찍 출발했으니 아직 숲 안으로 깊이 진입하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말릴 수 있어!”
“······.”
쉐론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발을 굴렀지만, 나는 밀려오는 황당함에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이미 그 숲의 주인인 리치는 지난 밤에 내 손에 대가리가 깨져 소멸했고, 숲을 가득 채우던 언데드 군단은 전부 뼛가루가 되어 날아갔으며, 레이나의 할머니는 지금쯤 몸이 거의 회복했을거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빌은, 지금 목숨을 걸고 비장하게 텅 빈 정화 구역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정말이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우리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 마침내 ‘악령의 숲’ 경계에 다다랐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숲은 으스스한 살기 대신, 기묘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흔적을 보니 이미 숲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데요.”
“어쩌지······.”
쉐론이 마른침을 삼키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미스릴급 파티조차 전멸했다는 금역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숲 초입이라면······ 우리가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한스, 위험하면 바로 후퇴하는 거야.”
“그것보다 숲이 너무 조용한데요. 일단 초입만 살짝 들어가 보죠.”
내 제안에 쉐론이 긴장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장 빌의 흔적을 쫓아 숲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전설 속의 ‘악령의 숲’은 황당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빗자루로 대지를 싹 쓸어버린 것처럼, 혹은 하얀 백지가 된 것처럼 언데드의 흔적은커녕 불길한 마력조차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스,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요.”
쉐론은 사방을 경계하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정확히는 쉐론 혼자 영화 한편을 찍으며) 숲 안쪽으로 무려 1시간가량 깊숙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쉐론이 허탈한 듯 검을 슬며시 내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가 정말 그 악령의 숲 맞아? 악명에 비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당연하지. 밤새 내가 싹 다 없애 버렸으니까.’
겨우 서너 시간 잔 탓에 온몸이 무거웠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품을 삼켰다.
리치를 소멸시키면서 숲 전체의 언데드가 뼛가루가 되어 날아갔으니,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젯밤 내가 발견했던, 시리아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그 오래된 연구실이었다.
“······.”
빌은 연구실 마당에 지천으로 널린 초목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숲이 정화되면서 생기를 되찾은, 그러나 이름도 모를 약초들을 세상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사색이 되어 숲을 헤쳐 온 보람도 없이 평화로운 그 꼬락서니를 보자, 참다못한 쉐론이 등 뒤에서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빌! 이 멍청아――!!”
“악?! 깜짝이야!”
깜짝 놀란 빌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고개를 들었다.
제 동료들이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쫓아왔는지 영문도 모르는 녀석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씩 웃으며 대꾸했다.
“어? 쉐론! 한스! 너희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이것 좀 봐, 내가 드디어 약초를 발견한 것 같아! ······
근데, 뭐가 실버문인지 도통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