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인형극

기억의 실타래를 붙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툭툭, 쉐론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뭐해? 정신 차려. 녀석들 방금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간 모양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빨간 두건 일행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쉐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칼로스가 이곳 벨하임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부터 조사해 봐야겠어요.

그걸 알아내야 녀석들이 뭘 깨우려는 건지 갈피가 잡힐 것 같아요.”

“그래, 녀석들의 목적도 모른 채 섣불리 던전까지 따라 들어갔다간 도리어 함정에 빠질 수 있으니까.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게 맞겠지.”

쉐론이 긍정하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이내 머리를 짚으며 푸념하듯이 중얼거렸다.

“하아······ 내 팔자야.

정말이지 세계수의 묘목을 찾아야 하는데,

칼로스가 싸질러 놓은 똥같은 일들에 계속 발이 묶이네.”

나는 목소리를 낮춰 비밀스럽게 쉐론에게 물었다.

“쉐론,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왜 칼로스를 혼자서만 찾으러 다니는 거에요?

여러 명이 팀을 짜서 움직여도 됐을 거 아닌가요?”

내 질문에 쉐론은 주위를 슥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은 묘목이 아직 있으니, 내 임무는 일종의 보험 같은 거랄까.

수행을 겸해서 지시받은 거지.

그걸 확보해 무사히 돌아가는 게 본래 목적이라, 원래대로라면 칼로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렸다가 챙길 생각이었어.

그런데 녀석이 매직백과 함께 증발해 버렸잖아.”

“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칼로스가 죽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까.

엘프는 몇백 년을 사니 몇십 년 정도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터였다.

칼로스 역시 인간이니 가만히 놔두면 얼마 안 가 늙어 죽을 거라 생각했겠지.

‘인간의 일생을 무슨 지나가는 감기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엘프 특유의 스케일이 다른 시간 감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음날, 우리는 또다시 길드를 기웃거리며 칼로스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수도라면 모를까, 벨하임 같은 변방의 소도시에서는 쓸 만한 사건 기록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내가 정확히 언제 벨하임에 왔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다만 시간상으로 계산해 보면 대략 2년 전의 일일 것이다.

그 전후로 ‘이든의 사과’를 구하러 대륙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닐 때는 벨하임 쪽에 전혀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2년 전에 이 근처 던전에서 무언가 대형 사고를 쳤다는 소린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나는 쉐론과 잠시 다리를 식힐 겸 광장 벤치에 걸터앉았다.

마침 저만치 앞 분수대 광장에서 왁자지껄하게 작은 인형극 무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형극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내 눈등이 가늘어졌다.

[[ 재앙의 칼로스와 벨하임의 눈물 : 던전을 복구한 이들의 피나는 서사시 ]]

······제목부터 예감이 무척 불길했다.

잠시 후, 덥수룩한 수염을 붙인 중년 남성 모양의 ‘칼로스 인형’이 무대 위로 튀어나와 칼을 붕붕 휘두르며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여기에 거대 뱀, 우로보로스가 봉인되어 있다고 들었다! 나는 오늘 너를 도륙하고 그 피를 취해 더욱 강해지리라!”

이어서 조잡하게 만든 뱀 인형이 나타나더니, 두 인형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무대 배경으로 세워둔 던전 세트를 사정없이 박살 내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아스란티어 세계에서 던전이란 단순한 재앙의 온상이 아니었다.

헌터들과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마물 부산물을 얻는 ‘생계 수단’이자 영지 경제의 핵심이었기에, 영주들이 직접 관리하며 적절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었다.

마물이 너무 많으면 위험하지만, 씨가 마르면 당장 먹고살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형극 속 칼로스는 아주 가관이었다.

우로보로스와 치고받는 과정에서 던전 전체를 통째로 붕괴시킨 것도 모자라, 그 안에 살던 마물들까지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이야기꾼 역할을 맡은 녀석이 슬픈 목소리로 내레이션을 깔았다.

“재앙의 칼로스가 떠난 자리에는 오직 썩은 비린내만이 진동할 뿐이었습니다!

무너진 생태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벨하임의 수많은 헌터와 영민들은 하루아침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하여 영민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힘을 모았으니······

던전에 남은 새끼 몬스터들을 가축처럼 극진히 보살펴 키우며 눈물겨운 복구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몬스터의 썩는 냄새가 6개월 남짓 만에 깨끗이 사라졌고 마침내 우리는 성공해 냈습니다!”

“······.”

인형극을 보던 내 대가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사고를 친 수준이 아니었다.

남들의 소중한 직장이자 삶의 터전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튄 것이었다.

옆을 슬쩍 보니, 쉐론 역시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인형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기억이 있었다.

먹이.

네모 문신 녀석들이 나직하게 읊조리던 그 단어가, 방금 전 이야기꾼의 목소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과거 내가 우로보로스를 도륙할 때, 둥지 깊은 곳에 무언가 더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히 있었다.

아직 부화하지 않았던 거대한 알들이.

당시의 나는 오직 눈앞의 강적과 싸우는 것에만 심취해 있었기에, 발밑에 새끼가 있든 알이 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깽판을 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몬스터의 썩는 냄새가 6개월 남짓 만에 깨끗이 사라졌고······.”

그 해설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순간,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6개월 만에 냄새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둥지에 남겨졌던 알들이 부화하기에 딱 알맞은 기간이었던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힌 우로보로스의 새끼들이, 내가 사방에 흩뿌려 놓은 마물들의 사체를 6개월 동안 단 한 조각도 남김없이 전부 먹어 치운 게 분명했다.

대륙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할 최고급 양분을 배불리 삼킨 놈들은, 포식을 끝내고 그대로 깊은 잠복기에 들어갔으리라.

뱀 종류의 이물들은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는다.

특히 우로보로스 계열의 이물은 잠복기 동안 혹독하고 긴 탈피를 거치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지는 특성이 있었다.

‘······결국 내가 그 새끼들을 위해 완벽한 영양분과 환경을 제공해 준 꼴이잖아.’

더 소름 끼치는 사실은, 이 무시무시한 진실을 지금 지상의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평화롭고 풍요로운 날들이 수년간 이어져 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들의 발밑, 던전 가장 깊은 바닥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이 똬리를 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리고 검은 문신의 조직 놈들은, 바로 그 시한폭탄을 흔들어 깨울 심산이었다.

관자놀이가 아까보다 훨씬 더 징하게 울려왔다.

‘젠장, 어쩌지······ 이걸 쉐론에게 어떻게 알려줘야 하나.’

내가 칼로스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이 위험한 진실을 공유해야 했다

나는 일단 슬쩍 운이나 띄워보자는 심산으로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6개월 만에 던전의 그 지독한 마물 썩는 냄새가 통째로 사라지는 게 마법도 아니고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내 질문에 쉐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아무리 영민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며 치웠다고 해도,
던전 심층부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엄청난 양의 사체들을 일일이 처분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과연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

판은 깔렸으니 이제 핵심 힌트를 던질 차례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한마디를 덧붙였다.

“만약 말이죠. 영민들이 치운 게 아니라······

둥지에 남아 있던 뱀 새끼들이 살아서 그걸 전부 먹어 치운 거라면?”

“······!”

그 순간, 쉐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뇌리를 번뜩 스치는 생각에 소름이 돋은 듯,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만약 우로보로스의 새끼들이 살아남아 그 무지막지한 마력과 영양분을 통째로 포식한 거라면······

전부 말이 돼!

6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악취가 사라진 것도,

그동안 던전이 기묘할 정도로 잠잠했던 것도!”

흥분한 쉐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 새끼들은 수년간 이어진 긴 탈피를 거쳐,

마침내 진화를 완전히 끝마치는 단계에 도달했다는 소리야.

그 우로보로스를 초월한 괴물을······

만약 그 문신 녀석들이 아주 살짝 건드려 깨우기라도 한다면······.”

“여기는 그대로 지옥이 되겠군요.”

내 말에 쉐론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굳이 긴 말을 섞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이 이미 같은 답을 내리고 있었다.

퍼즐은 완벽하게 맞춰졌다.

이제 남은 것은 저 깊은 밑바닥에서 눈을 뜨려는 재앙을 막아 세우는 것뿐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쉐론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이거 막을 수 있겠어?”

걱정이 가득 묻어나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나는 짐짓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러자 쉐론의 미간이 슬프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시선이 내 전신을 무겁게 훑었다.

“하지만 이 일에 끼어들면 네 생명력이 또 줄어들 거잖아.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가늠조차 안 되는데······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이 힘을 쓸 때마다 내 수명이 깎여 나간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영웅처럼, 씁쓸하면서도 한없이 의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요.”

슬쩍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던진 뒤, 나는 시선을 멀리 던지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인데,

이왕이면 이런 좋은 곳에 힘을 쓰고 가는 게 훨씬 가치 있지 않겠어요?”

순간 쉐론은 감동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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