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니
제 생명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그 숭고한 대사에 엘프의 감성이 완전히 저격당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세상의 구원자를 바라보는 듯한, 기특함과 애틋함이 가득 담긴 손길이었다.
“······칼로스는 제 욕망을 위해 세상을 망쳤는데, 너는 네 생명을 줄여가며 세상을 구하는구나.
참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해.”
눈물겨운 찬사였다.
쉐론의 눈빛은 이미 나를 ‘대륙의 성자’ 정도로 격상시켜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 따스한 손길을 받으며, 나는 영혼이 가출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착하긴 개뿔’
눈물 나게 고마운 오해지만, 팩트는 대차게 틀렸다.
과거의 죄질이 너무 나빠서 차마 내가 그 칼로스라고 자수도 못 하고, 제 손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뒷처리를 해야 하는 전설급 빌런의 고달픈 속사정.
그걸 알 리 없는 순진한 엘프는 그저 감동에 젖은 눈으로 나를 성자 보듯 쓸어내릴 뿐이었다.
밀려드는 현타에 나는 그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발밑의 시한폭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째깍거리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빠르게 식량을 확보한 뒤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이제는 앞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놈들이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새끼들을 깨우기 전에,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목을 베어 버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무조건 네모 문신 놈들보다 한발 먼저 종착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보나마나 놈들이 노리는 제단이나 위치는 던전의 최하층일 터였다.
과거 칼로스 시절, 내가 눈이 뒤집혀 깽판을 쳤던 바로 그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
우리는 사방에서 조여오는 시간의 압박을 느끼며, 재앙이 잠든 지하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하루를 걸쳐서 나선형의 던전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지칠 여력조차 없었다.
놈들이 먼저 도착한다면 일이 골치 아파질 게 뻔했다.
심연에 도사린 그놈의 뱀 새끼들이 대체 몇 마리나 부화했을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두 마리라면 그래도 숨통을 끊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숫자가 그 이상으로 많다면 처치하는 데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그만큼 내 힘을 쏟아야 하니 내 수명 또한 겉잡을 수 없이 깎여 나가게 된다.
결코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어둠을 헤치며, 우리가 얼추 던전 바닥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쯤이었다.
지하의 무거운 공기를 타고 낯선 인기척이 흘러들었다.
‘······쳇, 상황이 안 좋은데.’
설마 그 문신 놈들이 지체 없이 곧장 이곳 최하층까지 내려왔을 줄이야.
한 발 늦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지하 마지막 입구에 막 들어서려던 그 찰나였다.
쿠구구구궁!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굉음이 지하 공간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뒤이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뒤엉켜 터져 나왔다.
“이, 이건 계획이랑 다르잖아······! 컥!”
“하느님 맙소사! 살려줘!”
“우린······ 우리는 그 녀석들에게 속았어!”
사방에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마주쳤던 그 문신 무리 녀석들이 추풍낙엽처럼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참상을 보며 나는 차갑게 혀를 찼다.
‘당연한 결과다.’
제대로 된 퇴로나 방도도 마련하지 않은 채, 심연에 잠든 괴물을 무작정 깨우기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저 멍청이들은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눈이 뒤집혀 깨어난 우로보로스의 새끼들에게 눈앞의 인간들은 그저 기분 좋은 아침 식사(밥)에 불과할 뿐이었다.
결국 이들에게 괴물을 깨우라고 지시한 윗대가리 놈들이,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이 무지한 말단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희생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버려진 셈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몇 년 전의 전말이 그제야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원래대로라면 던전 심층부에 갇힌 뱀 새끼들은 먹이가 부족해 서로를 잡아먹으며 최종적으로 가장 강한 한 마리만 남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과거 칼로스 시절, 나 때문에 이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마물 사체들이 화근이었다.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동족 포식을 할 필요도 없이, 10여 마리가 넘는 녀석들이 한데 뭉쳐 실타래처럼 꼬인 채 그대로 긴 진화의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대단했던 영양분을 모두 소진하고, 극도의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상태로 동시에 깨어나 버린 것이다.
스르륵, 스르르륵.
어둠 속에서 드러난 대가리 하나의 크기만 해도 황소만 했다.
대충 가늠해 봐도 한 마리당 몸길이가 최소 10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초대형 마수들이었다.
저런 괴물들이 떼거지로 뭉쳐있다니,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녀석들이 너무 거대한 덩치로 한데 뭉쳐 자는 바람에 몸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점이었다.
급하게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는 있지만, 제풀에 서로 엉켜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중이었다.
녀석들이 꼬인 몸을 풀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쓸어버려야 했다.
나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녀석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이 자리에서 전부 쓸어버려야 했다.
뒤따라오던 쉐론을 향해 기를 쓰며 소리쳤다.
“쉐론! 가까이 오지 마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으로 땅을 박차고 나아가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비틀어 뽑아냈다.
고작 링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전신을 결박하고 있던 사슬이 깨어진 듯 봉인되어 있던 칼로스의 거대하고 흉포한 마력이 폭포수처럼 몰려왔다.
혈관이 타들어 갈 듯한 가공할 힘이었다.
그때, 피비린내를 풍기며 다가온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나를 통째로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 무지막지한 구석을 향해 정면으로 몸을 날렸다.
스스로 괴물의 식도 깊숙이 파고든 순간, 전신에서 흉포한 마력을 사방으로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앙!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온 마력의 폭풍은 뱀의 가죽을 찢고 사방으로 비산했다.
지독하게 엉켜 있던 녀석들의 매듭이 화근이었다.
한 마리의 체내에서 터진 폭쇄의 충격파가 도미노처럼 번지며, 다닥다닥 붙어 있던 녀석들 중 무려 다섯 마리가 연쇄적으로 폭발해 비계와 파편으로 화했다.
쿠웅!
핏물과 고기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허공에서 그대로 튕겨 나왔다.
착지하기도 전, 허공을 움켜쥔 양손에 뇌전의 권능을 끌어모았다.
가차 없이 압축된 거대한 라이트닝 볼이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콰광!
퍼엉!
내던져진 뇌전의 구체들이 유도탄처럼 정확히 내달려 뱀들의 목을 차례로 터뜨려 나갔다.
허나 아직 절반이 남았다.
나는 그대로 녀석들의 한가운데, 심연의 가장 깊은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전신을 축으로 삼아 폭발적인 회전을 개시했다.
내 몸을 중심으로 흉포한 마력의 폭풍이 일어났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칼로스의 사악하고 거대한 마력은 대기를 마찰시켜 순식간에 불기운을 집어삼킨 거대한 화염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쿠구구구구-
콰아아아악!
지하 광장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불폭풍이 몰아치며 사방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악취와 함께 질식할 것 같은 열기가 공기를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잿더미로 변해가는 괴물들의 실루엣을 마지막으로, 던전 내부에는 오직 완전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상황 종료.
“······하아.”
타오르는 불꽃의 잔영 속에서, 나는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지독한 구속구가 다시 채워지는 순간, 온몸의 힘이 거짓말처럼 빠져나갔다.
생명력을 통째로 갈아 넣은 대가는 처참했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다리가 꺾였다.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한스! 한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쉐론의 절박한 목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메아리쳤다.
그 애타는 외침을 이정표 삼아, 나는 밀려오는 아득한 암전 속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겁게 감겨 있던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동굴 한편에 처참하게 뒹굴고 있는 거대한 뱀의 대가리였다.
그 주변으로는 급히 챙겨온 식량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이 주변을 온기로 채우고 있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부드러움과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보니, 내 머리는 쉐론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잔뜩 붉어진 눈으로, 정성스럽게 물수건을 짜서 내 이마와 뺨을 구석구석 닦아주고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자마자, 쉐론의 초록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 이제 정신이 들어?”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한바탕 눈물 바람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거의 세 시간 만에 깨어났어. 몸은 좀 어때?
······또 그렇게 무리해서 많은 힘을 사용해 버리다니.”
그녀는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듯 속삭였다.
“네가······ 네가 세상을 구한 거야, 한스.”
대륙의 숨은 성자를 바라보는 듯한 그 지독하게 숭고한 눈빛에, 나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세상을 구하긴······.’
아직도 얼만큼이나 이런 일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만약 저 순진한 엘프가 그 전말을 전부 알게 된다면, 감동이 아니라 기겁을 하며 기절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