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짜 죽어버린 줄 알았어.
한동안 정말 숨이 완전히 멈춘 것처럼 보였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겨우 숨통이 돌아오더라.
정말······ 정말 다행이야.”
쉐론이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절해 있던 순간의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쉐론의 떨리는 목소리가 당시의 아찔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설명해 준 셈이었다.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힘을 다하고 쓰러진 무방비한 상태에서, 누군가 나를 떠나지 않고 온전히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피비린내 나는 삶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설고도 따스한 안도감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민망함과 간지러운 감정을 감추기 위해, 나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마워요, 쉐론.”
반지가 채워지며 마력이 씻은 듯이 사라진 탓일까.
말을 더듬는 내 모습은 평소의 어리숙한 한스 그 자체로 돌아와 있었다.
본래 힘이 없어 늘 헐렁하고 무해해 보이던 그 인상이, 방금 전 내가 느꼈던 생소한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자연스럽게 감추어 주었다.
상황이 완전히 일단락되자, 우리는 천천히 던전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올 때는 눈이 뒤집혀 정신없이 내달린 덕에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던 길이었다.
하지만 지상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지친 내 몸 상태를 배려해 워낙 느긋하게 움직인 탓도 있었지만, 결국 바깥세상의 빛을 다시 보기까지는 꼬박 사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올라가는 길에 평화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어두컴컴한 미로 구석구석에서 눈치 없는 마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우리를 귀찮게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었다.
스릉-!
콰아아앙!
“한스는 내 뒤에 가만히 있어!”
쉐론이 든든하게 앞장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을 따라 서슬 퍼런 마력이 휘몰아치더니, 가볍게 휘두른 일격이 날카로운 검기가 되어 마물들을 사정없이 작살내 버렸다.
평소보다 더 헐렁해진 나를 절대 다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매서운 기세로 마법과 검술을 쏟아부으며 마물들을 도륙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듬직해 보였다.
우리가 방금 대륙을 뒤흔들 뻔한 대재앙을 막고 왔다는 사실을 세상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쉐론만큼은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 위대한 승리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나를 이끌고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잔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술집에서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딸랑,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순간, 왁자지껄하던 술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노인의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안광과 온갖 사선을 넘나든 자.
특유의 서슬 퍼런 기운.
그것은 마치 전장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 피비린내를 풍기던 과거의 ‘나(칼로스)’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내가 나를 이렇게 표현하려니 조금 멋쩍긴 하지만······ 술집 안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설마······ 칼로스인가?’
하는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노인을 주시했다.
자리가 부족했는지 노인은 술집 안을 슥 훑어보았다.
마침 우리 테이블에 자리가 하나 비어 있자, 그가 묵직한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노인은 우리 자리에 멈춰 서더니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자리가 없군. 실례하겠네.”
그리고는 다소 지친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쳤다.
“여기 주인양반, 아주 독한 술로 한 잔 내주게.”
노인이 가득 채워진 술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야,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던 술집이 다시 왁자지껄하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 그럴리 없지, 그냥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야.’
하는 안도의 속삭임들이 사방에서 흩어졌다.
노인은 가만히 우리 표정을 살피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어서 한잔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늙은이가 눈치 없이 분위기를 깬 것 같아 미안하군.
내가 오늘 다소 힘든 하루를 보내서 말이네. 미안한 마음을 담아 술 한잔 사지.”
말하는 태도가 묵직하면서도 젠틀함이 묻어나는 멋진 노인이었다.
과거에 오직 살기와 폭력으로만 군림하며 누구에게도 호의를 베풀어본 적 없던 나(칼로스)와는 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과거의 나도 저런 멋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타인에게 선의를 베푸는 노장의 뒷모습을 보며, 아주 잠깐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들 때쯤 노인이 통성명을 건네왔다.
“나는 가레스라고 하네. 실베리아 대삼림 쪽에서 굴러먹고 있는 용병이지.”
상대가 먼저 통성명을 해왔으니, 우리도 사전에 약속해 둔 가짜 신분을 꺼내 들 차례였다. 쉐론이 먼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섰다.
“저는 루나라고 하고, 이쪽은 제 동생 토마예요.”
앞으로 여행할 때를 대비해, 몬스터의 습격으로 고향을 잃고 적당히 방랑하는 오누이로 설정을 맞춰 둔 터였다.
가레스는 힘없는 내 인상과 얄상한 몸을 슥 훑어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동생 녀석이 손이 아주 많이 가게 생겼군. 누나가 고생이 많겠어.”
“아니에요. 보기보다 든든해서, 동생 덕에 목숨을 여러 번 부지했거든요.”
쉐론이 나를 흘낏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뭐, 사실이긴 하다.
가레스는 “사이가 참 좋은 오누이로군.”이라며 씁쓸하게 웃었고, 나는 슬쩍 운을 띄웠다.
“그런데 가레스 님, 무슨 힘든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내 질문에 가레스의 표정이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방금 모험가 길드에 보고를 막 마치고 오는 길이라네. 실베리아 쪽에······ 드래곤이 출몰했어.”
“드래곤이요?!”
루나—아니, 쉐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마을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행히 마을 초입만 쑥대밭이 되고 그쳤지.
내가 어떻게든 막아보려 최전선에 섰지만······
우리 용병단에는 이렇다 할 마법사가 없어서 말이야.
결국 전멸하고 몇 명 겨우 살아남아 도망쳤다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황을 들어보니 이곳이 제도(수도)보다 가까우니 우선 급한 대로 길드에 원조를 구하러 온 모양이었다.
가레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드래곤 놈이 아무래도 실베리아 대삼림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는 모양이라 골치가 아프네.”
원래 아스란티어 대륙에는 드래곤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깊은 동굴이나 험준한 요새에 박혀 조용히 지내다가, 몇십 년에 한 번씩 기어 나와 닥치는 대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기나긴 동면에 들어가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던전 안에는 드래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녀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먹이를 찾아 기어나온 모양이었다.
“길드에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다들 회의적이야.
‘미스릴 등급 파티’라도 몰고 와서 총력전을 벌이지 않는 한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파티를 어디서 구하겠나?
결국 놈이 적당히 가축들을 잡아먹고 제풀에 지쳐 동면에 들 때까지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자는 심산이지.”
“그럼 그동안 가축이며, 마을 사람들의 피해는 계속 늘어날 텐데요?”
쉐론의 말에 가레스가 씁쓸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겠지···
···. 참, 이럴 때 보면 안타까워.
그 악명 높은 칼로스 놈이 살아생전 온갖 미친 짓거리는 다 하고 다녔어도···
··· 드래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쳐죽여 줬는데 말이야.”
‘어라.’
노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속으로 찔끔했다.
하지만 드래곤이라니.
솔직히 내 기억 속의 드래곤은 대재앙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돌아다니다가 가끔 날아다니는 ‘희귀종 거대 새’ 같은 인상이었다.
덩치가 좀 크고, 날갯짓할 때 풍압이 장난 아니고, 입에서 불 좀 뿜고, 몸뚱이가 꽤 단단하다는 것 정도?
무엇보다 하늘을 종횡무진 누비는 놈들이라, 칼로스 시절의 내게는 덩치가 워낙 커 사냥하기 좋은 최고의 장난감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륙을 방랑하며 눈에 밟히는 대로 죽인 드래곤이 꽤 되긴 했다.
과거에 비해 대륙의 드래곤 개체 수가 급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멸종 위기종으로 만든 지분의 3분의 2는 순전히 심심했던 내 탓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칼로스 시절에 저지른 일 중 유일하게 세상에 보탬이 된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수도로 다시 올라가 지원이 가능한지 알아볼 생각이네.
자네들도 여행길에 부디 조심하게나.”
그 말을 남긴 채, 백전노장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을 때, 나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 묵묵한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쉐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스······ 너 설마, 거기 가려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쉐론은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배를 채우면 다시 동면에 들 텐데, 우리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갈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녀석이 배를 다 채우기 전까지는 무고한 가축들과 마을 사람들의 피해가 계속 나오잖아요.”
여전히 비리비리해 보이는 내가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믿음이 안 갈 만큼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뭐, 힘을 크게 쓸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솔직히 드래곤 정도라면 마력을 대단하게 짜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매직백 구석에 박혀 있을 법한 ‘단단하고 큰 창’ 하나를 골라잡아 미사일처럼 던져버리면 그만이니까.
“힘을 많이 쓸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냥 아주 단단하고 큰 창 하나만 구해서 던지면 끝날 거 같거든요.”
내 말에 쉐론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깊은 감동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말······ 정말 그렇게 적은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지?”
“아마도요.”
“우리 한스는 참 착하구나······.”
요새 부쩍 감동을 자주하는 쉐론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기세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테이블을 가볍게 탁 쳤다.
“어차피 어디 있는지 모르는 칼로스의 매직백을 아무 데서나 찾아 헤매고 있는 처지잖아? 실베리아 대삼림 쪽으로 약간 돌아서 수도로 가도 전혀 상관없겠지!”
‘뭐, 겸사겸사 새 사냥이나 하러 가볼까.’
그렇게 우리는 드래곤이 둥지를 틀었다는 실베리아 대삼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