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드래곤(1)

우리는 벨하임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실베리아 대삼림으로 들어섰다.

과연 대삼림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딱 어울리는 울창한 숲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내게 실베리아는 그저 심심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는 인식뿐이었다.

하지만 쉐론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어제 술집에서 노병 가레스와 대화하던 중, 과거 시절에 이곳 대삼림에서 숨통을 끊지 못하고 놓쳤던 드래곤 한 마리가 문득 기억났기 때문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녀석은 아마 한쪽 날개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 있을 터였다.

왠지 이번에 출몰해 쑥대밭을 만들었다는 녀석이 바로 그놈일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나한테 쫓기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하고 억지로 동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농후했으니까.

그렇게 나무가 빽빽한 산림을 헤치고 나아가던 중, 저 멀리 상공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실루엣이 포착되었다.

다행히 마을 쪽이 아닌 숲 깊은 곳에서 배회하며 먹이를 찾고 있는 듯했다.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매직백에서 슬쩍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축소되어 있던 유물이 가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원래 크기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쿠웅, 하고 바닥에 박힌 것은 사람 키만 한 커다란 쇠말뚝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그 쇠말뚝이에요. 이걸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쉐론에게 태연하게 설명했다.

사실 이 쇠말뚝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과거 어느 던전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치우다가 덤으로 주웠던 물건이다.

뱀파이어 백작인가 하는 놈과 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하여간 쉐론에게는 내가 유물 수집이라는 특이한 취미가 있어서 신기한 것만 보면 무조건 가방에 쑤셔 넣는 버릇이 있다고 밑밥을 깔아둔 상태였다.

나는 적당한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멀리 날아가는 녀석을 겨냥했다.

한손으로 묵직한 쇠말뚝을 든 상태에서, 녀석을 확실하게 격추하기 위해 왼손의 반지를 아주 살짝 개방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유히 날아가던 드래곤 놈이 갑자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전력을 다한 날개짓으로 엄청난 속도의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

나는 얼떨결에 반지를 다시 잠갔다.

나와 쉐론 둘 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녀석이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반지의 힘은 제대로 쓰지도 못했는데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저놈이 반대편에 더 맛있는 먹이라도 발견해서 급하게 간 거겠지’ 하고 애써 넘기며 다시 대삼림을 뒤졌다.

그렇게 반나절을 더 헤매다 저 멀리서 녀석의 꼬리가 다시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투창 자세를 잡고 반지를 개방하려는 찰나— 녀석은 또다시 기겁하며 비행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도망쳐 버렸다.

‘뭐야, 저 새끼?’

이쯤 되니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놈, 내 마력 파동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이름 같은 건 몰라도, 과거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무시무시한 영혼의 압박감을 뼈에 새겨둔 모양이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쉐론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스······ 저놈, 혹시 네가 말뚝 들고 자세 잡는 게 무서워서 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글쎄······ 나도 이런 황당한 사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우리가 녀석을 사냥하러 다니는 건 맞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이라는 드래곤이 인간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다닌다는 소리는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우리는 오기를 품고 녀석의 행방을 쫓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젠 반지를 개방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멀리서 내 실루엣이 보이기만 하면 드래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 녀석은 내 존재를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고, 나라는 인간을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드래곤과 숨바꼭질하듯 찾으면 도망가고, 찾으면 도망가는 눈물겨운 추격전이 이틀 내내 반복되었다.

이쯤 되니 사냥을 하는 우리마저 진이 다 빠져서 지쳐갔다.

쉐론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오, 저 쫄보 드래곤 새끼······ 대체 어쩌라는 거야!”

어느새 쉐론의 머릿속에서 실베리아의 재앙은 ‘쫄보 드래곤 새끼’로 완벽하게 격하되어 있었다.

나 역시 드래곤의 탈을 쓰고 저렇게 가오 상하게 구는 놈은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

결국 녀석을 찾지 못하고 지친 우리는, 숲속의 작은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살다 살다 드래곤이 사람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소린 들어본 적도 없다, 정말.”

모닥불 위에 냄비를 올리고 음식을 데우던 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요. 나도 이런 기괴한 이야기는 책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투덜거리며 간신히 음식을 입에 넣으려던 찰나, 쉐론이 갑자기 숟가락을 멈추고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주변 숲에 몬스터가 접근했다는 신호였다.

나는 조용히 검자루를 쥐었고, 쉐론은 바닥을 거차게 박차며 수풀 속으로 번개처럼 뛰어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수풀 너머에서 쉐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검을 내려치려던 쉐론이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궁금증이 생겨 나 역시 서둘러 숲으로 쫓아 들어갔다.

그곳에는 웬 조그마한 ‘잼 드래곤’ 한 마리가 온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쉐론은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이 조그마한 도마뱀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그 뒤를 따라 다가서자, 내 얼굴을 확인한 잼 드래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동시에, 내 머릿속으로 찌르르한 정신 감응이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나 좀 살려줘! 그만 좀 괴롭혀, 이 괴물 같은 인간아!!!]

녀석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물기가 가득했다.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턱을 딱딱 부딪치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영문을 몰라 녀석을 뜯어보던 중, 녀석의 접힌 한쪽 날개에 선명한 구멍 자국이 보였다.

‘······어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대꾸했다.

‘지금 나한테 말 건 거냐?’

[—그래, 너! 그 무서운 기운 풍기는 인간 맞잖아!

나 좀 살려줘라, 응?

나 진짜 그냥 너무 배고파서 잠깐 기어 나온 거야!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

나는 녀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쉐론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 녀석······ 몬스터라기엔 상태가 이상해요. 배가 많이 고프고 지쳐 있는 것 같은데요.”

쉐론이 턱을 괴고 잠깐 고민에 잠겼다.

“잼 드래곤이 이런 야생 대삼림에 왜 있지? 그참 희한하네.”

잼 드래곤은 본래 수도의 황족이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최고급 애완용 드래곤이었다.

크기는 작고 귀여우면서도 명색이 드래곤이라 브레스도 뿜고 주인을 지킬 능력도 있어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쉐론이 칼을 거두며 손짓을 했다.

“쉭, 가라 이놈아. 여긴 위험해.”

하지만 녀석은 가기는커녕,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로 쭐래쭐래 우리를 쫓아왔다.

저리 가라고 손사래를 쳐도 필사적으로 엉겨 붙었다.

결국 모닥불 앞까지 당당하게 입성한 녀석은, 물끄러미 우리가 먹으려던 음식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쟤, 오늘 우리 먹을 거 안 주면 절대 안 갈 기세인데? 오늘 드래곤들은 왜 다 이 모양이야?”

쉐론이 기가 찬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녀석의 앞에 냄비를 내려놓으며 머릿속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내 말이 들려?’

녀석이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내가 무서운 놈인 건 확실히 알고 있고?’

다시 한번 고개가 격렬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 넓은 대륙에서 아무도 내 본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엉뚱하게도 숲속에서 만난 도마뱀만 한 드래곤이 내 본모습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벌벌 떠는 유일한 존재가 된 셈이었다.

“일단 먹어.”

나는 입 밖으로는 짐짓 덤덤하게 말하며 스프와 고기를 잔뜩 퍼주었다.

녀석은 눈이 뒤집혀서 한순간에 음식을 싹싹 비워내더니, 여전히 굶주린 불쌍한 눈빛으로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뭐야, 이놈 엄청나게 굶었나 보네. 한스, 매직백에 먹을 것 좀 넉넉히 있으면 더 줘봐.”

“네, 알았어요.”

어차피 내 매직백에는 비상식량이 차고 넘쳤다.

나는 가방 구석에서 훈제 고기와 대형 빵을 계속해서 꺼내주었다.

놈은 정말 대단한 대식가였다.

주는 대로 블랙홀처럼 음식을 집어삼키는데, 그동안 내 살기에 쫄아서 얼마나 오랜 시간 굶주렸는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배가 빵빵하게 부르고 나서야 녀석은 비로소 만족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진정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짐짓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참 별일이네. 무슨 덩치 큰 고양이도 아니고······.”

“그러게. 보통 드래곤들은 자존심이 세서 사람을 절대 안 따르잖아?

아주 어릴 때부터 애완용으로 길들인 게 아니라면 말이야.”

“누군가가 키우다 잃어버린 애완동물은 아니겠죠?”

내 질문에 녀석이 즉시 내 머릿속으로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나 애완동물 아니다! 너 같은 무서운 인간 피하려고 뼈를 깎는 변신 마법까지 쓴 거라고! 제발 나 좀 살려줘라!]

비참한 진실은 오직 나에게만 들려오고 있었다.

쉐론은 녀석의 목덜미와 몸통을 슥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귀족들의 표식도 전혀 없고, 털이나 비늘 상태도 전혀 다듬어져 있지 않잖아. 참 희한한 놈이네, 진짜.”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녀석의 절박한 구걸이 끊이지 않았다.

[—나 살려줘라, 어? 이제 진짜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살게. 그냥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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