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매달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기묘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랐다.
‘······너도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이겠지.’
처절하게 울부짖는 그 목소리 위로, 전생의 지구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허우적대던 나의 옛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녀석에게 사념을 보냈다.
‘알았으니까 그만 징징대. 안 죽여.’
[—정말이지? 진짜 약속했다? 나 절대 안 죽이는 거지?
근데······ 나 몸은 작아졌어도 드래곤이라 자주 배고프단 말이야.
숲에는 이제 먹을 것도 없고······.]
안 죽인다는 확답을 받자마자, 녀석은 아예 내 다리 옆에 딱 붙어 누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쉐론이 황당함과 난감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뭔 드래곤이 사냥꾼을 간택하냐······?
참나, 우리는 지금 실베리아를 위협하는 ‘그 쫄보 드래곤’을 찾아야 하는데, 이 조그만 놈이 방해하네.”
그녀가 찾는 대재앙이 바로 내 다리 밑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이 꼬맹이라는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드래곤이 살기 위해 귀여운 애완용 드래곤으로 강제 퇴화—아니, 변신까지 감행했다는 얘기는 나도, 대륙의 그 어떤 저명한 학자도 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쉐론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설명할 마음을 접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가리를 굴리고 있자, 녀석이 눈치를 살피며 내 머릿속으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 나 데려가면 도움 많이 된다!
매일 맛있는 음식만 주면 나 진짜 나쁜 짓 절대 안 해.
몸을 이렇게 줄여놔서 당분간 동면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 밥만 잘 먹여주면 주변에 얼씬거리는 다른 몬스터들도 다 물리쳐줄 수 있어!
어때? 나 데려가라, 응?]
이놈이 아주 아예 내 밑으로 기어들어 와 들러붙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녀석 입장에서도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긴 했다.
어차피 이대로 숲에 놔뒀다가 억지로 동면에 들게 한들, 나중에 깨어나면 또 허기를 채우려고 기어 나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게 뻔했다.
차라리 내 매직백에 넘쳐나는 식량을 축내게 하더라도 내가 곁에 끼고 감시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적어도 향후 수십 년간 실베리아 대삼림만큼은 쥐 죽은 듯 조용할 테니까.
문득 녀석이 호언장담한 능력이 궁금해져 슬쩍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너 아까 변신 마법인가 뭔가 했다며? 원래 드래곤은 마법 같은 거 못 쓰잖아. 너 마법도 쓸 줄 아냐?’
내 핀잔 섞인 물음에 녀석이 억울하다는 듯 꼬리를 탁탁 치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영지에만 처박혀 있는 멍청한 일반 드래곤들이랑은 격이 달라!
나 나이 엄청 많단 말야.
대충 천 살 정도 됐어!
이쯤 나이를 먹으면 인간들이 쓰는 기괴한 마법 같은 것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된다구!]
그게 마법인지, 아니면 오래 산 영물 특유의 기묘한 신통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바닥에서 천 년이라는 세월을 용케 살아남으며 독자적인 능력을 터득한 모양이었다.
천 살이나 처먹은 대륙의 재앙이 내 다리에 매달려 밥 달라고 징징대는 꼴이라니.
진짜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다 싶으면서도, 나는 슬쩍 쉐론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 이 거대한 식충이를 어떻게 해야 의심 사지 않고 동료로 합류시킬 수 있을지, 생각할수록 한숨부터 나왔다.
그 뒤로 우리는 하루 정도 더 대삼림을 뒤지며 드래곤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와서 쉐론에게 진실을 말하기도 참 애매한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무작정 더 돌아다니기도 곤란했다.
결국 참다못한 쉐론이 답답하다는 듯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그 쫄보 드래곤 새끼는 그림자도 안 나타나고, 대신 이 도마뱀 녀석만 계속 쫓아다니네.
졸지에 이상한 애완동물이 하나 생겼어.”
나는 냄비를 정리하며 슬쩍 대답했다.
“뭐, 어쩔 수 없죠. 우리가 먹이를 안 주면 굶주려서 어딘가 가 또 사고를 칠 것 같은데, 일단 그냥 두죠.”
쉐론은 이제 다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뭐, 그냥 식충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해야지. 하아.”
그렇게 대충 동침을 청하고 난 뒤, 다시 아침이 밝았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늘 내 다리 밑에 붙어 잠들던 식충이가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주변 수풀을 둘러보던 쉐론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어? 얘 어디 갔지? 막상 안 보이니까 살짝 심심하네.”
“그러게요. 어제까지는 마냥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더니.”
막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던 찰나, 풀숲이 부스럭거리더니 식충이 녀석이 입에 무언가를 앙다물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야,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응? 뭐야, 이건?”
쉐론이 반색하며 다가갔을 때, 녀석은 내 발아래로 툭 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하나를 떨구었다.
그러고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어서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동시에 내 머릿속으로 녀석의 목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내가 네 고민 해결해 줄게! 얼른 따라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감이 안 잡혔지만, 나는 일단 짐짓 모르는 척 쉐론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우리 보고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요?”
쉐론은 손바닥 위의 보석을 갸웃하며 들여다보더니, 이내 나와 함께 녀석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얼마쯤 숲을 헤치고 나아갔을까, 눈앞에 거대한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슬쩍 전투 태세로 돌입한 뒤, 녀석의 안내를 받으며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어두운 통로를 한참 동안 걸어 들어가자,
마침내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과 유물들이 사방에서 안광을 뿜어내는 거대한 드래곤의 둥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화려한 보석 더미 한가운데에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팻말 하나가 삐딱하게 꽂혀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드래곤이 발톱으로 꾹꾹 눌러쓴 것 같은 글자였다.
‘나 여기 떠난다. 찾지 마라.’
“······.”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가 터져 나오는 기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번 눈치를 챘다.
우리가 자기를 잡겠다고 이틀 내내 숲을 쑤시고 다니니까, 이 영악한 놈이 ‘나 도망쳤으니 더는 찾을 필요 없다’라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가짜 현장을 급조해 둔 것이었다.
쉐론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황당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와······ 대륙의 재앙이라는 드래곤이 사람이 무서워서 둥지까지 버리고 야반도주를 하다니.
그나저나 이 팻말은 또 뭐야?
어이가 없네, 진짜.
드래곤이 공용어 글자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참 별일이다.”
나 역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팻말이라니······ 마치 우리 보라고 편지라도 남겨둔 인상이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녀석에게 넌지시 칭찬을 건넸다.
‘그래······ 네 얄량한 잔머리 덕분에 어쨌든 우리의 큰 고민거리가 하나 줄어들었네. 수고했다.’
내 칭찬에 신이 났는지, 녀석은 머릿속으로
[—나 잘했지? 잘했지!]
하고 잔뜩 소리를 지르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하지만 상황이 쉽게 일단락되지는 않았다.
둥지를 가득 채운 보석 더미를 바라보던 쉐론이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근데 이거 어쩌지? 이 보석과 엄청난 유물들 말이야.
이대로 그냥 두고 가자니 지나가던 불한당들이 홀라당 챙겨갈 것 같아서 기분 나쁘고······
그렇다고 녀석이 도망쳤다지만 엄연히 주인 있는 물건인데 우리가 덥석 챙기기도 썩 안 내키네.”
도적의 장물은 망설임 없이 쓸어 담던 녀석이, 드래곤의 유물 앞에서는 멈칫한다.
상대를 가려가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엘프 특유의 이질적인 태도였다.
사실 드래곤에게 보석과 유물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영혼을 위로하는 안식처와 같다.
저 녀석도 천 년 동안 나름대로 땀 흘려 모아둔 전 재산일 텐데, 놔두고 가자니 아깝고 훔치자니 양심에 찔리는 애매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드래곤이 사라진 건 축제급 경사였지만, 눈앞의 이 엄청난 보석 더미는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대충 어림잡아도 나라 하나쯤은 통째로 사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였으니까.
물론 내 매직백에 집어넣는다면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전부 담아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미 내 가방 안에는 이 정도 보석 따위는 우스울 만큼 전설적인 보물들이 차고 넘쳤으니.
우리가 보석 더미 앞에서 심각하게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자, 내 다리에 몸을 비비던 식충이가 묘책이 떠올랐다는 듯 사념을 보내왔다.
[—내가 다 먹어서 몸속에 숨겨둘래! 그럼 해결되지? 이제 너희 걱정 없는 거지?]
‘뭐?’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조그마한 잼 드래곤 녀석이 눈을 빛내며 보석과 유물들을 입안으로 게걸스럽게 와작와작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옆에서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나와 쉐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 몸뚱이보다 수백 배는 많은 보석과 유물들이 녀석의 조그마한 주둥이 속으로 마법처럼 빨려 들어가는데, 실로 기괴하면서도 놀라운 속도였다.
분명 입을 움직이는 모양새는 와작와작 게걸스럽게 삼키는 중인데, 신기하게도 보석이 깨지는 비명 대신 스르륵 흡수되는 잔상만 남았다.
녀석의 입안 자체가 거대한 아공간 매직백이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산더미 같던 유물과 보석들을 마지막까지 전부 입속으로 밀어 넣은 녀석이 볼을 찹찹 다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눈이 멀 것 같이 화려했던 둥지에는, 이제 먼지만 펄펄 날리는 휑한 빈 굴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러더니 녀석은 자기가 제 보물을 고스란히 챙긴 것뿐이면서도, 우리가 그것들을 가로채지 않고 양보해 준 게 내심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식충이 녀석은 눈을 반짝이며 내 다리와 쉐론의 발목 사이를 빙글빙글 맴돌며 재롱을 떨어댔다.
아주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다는 온몸으로 표현하는 몸짓이었다.
이에 쉐론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참나, 지가 다 먹어치워 놓고 우리가 양보해 준 줄 아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