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드래곤(3)

쉐론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드래곤이 남겨둔 팻말을 쑥 뽑아 들었다.

뭐, 어찌 됐든 상황은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우리는 동굴을 빠져나와 곧장 실베리아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드래곤의 행방을 몰라 잔뜩 불안에 떨고 있을 길드 측에 이 황당한 팻말을 증거품으로 척 제출하며, 드래곤 둥지를 발견했으나 녀석은 이미 야반도주를 한 상태였다고 대충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길드장과 직원들은 팻말만 보고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우리가 팻말과 함께 제출한 ‘드래곤 둥지 주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보석들’을 확인하자 안색이 싹 변했다.

확실한 증거를 목격하고 나서야 그들은 대재앙이 정말로 숲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가짜 명함을 들이밀며 당당하게 의뢰 성공을 주장했고, 길드 측으로부터 짭짤한 보상금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잼 드래곤은 내 다리 밑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고, 가짜 명함으로는 돈을 벌고. 참으로 기만적이고도 평화로운 실베리아의 아침이었다.

돌이켜보면 실베리아 대삼림에 다른 사나운 몬스터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다 저 식충이 녀석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생태계의 최정점인 드래곤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으니, 잔챙이들이 감히 이 주변에 둥지를 틀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강력한 포식자 덕분에 역설적으로 마을이 아담하고 소박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어쨌든 드래곤 소동도 끝났으니 더는 이 시골 마을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나와 쉐론은 짐을 꾸려 다시 원래 목적지였던 수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로 향하는 가파른 길목을 한참 지나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백전노장 가레스였다.

거대한 대검을 등에 멘 노병은 드래곤을 막아줄 지원군을 요청하러 그 먼 수도까지 다녀오는 길인 듯했다.

하지만 높으신 분들에게 한낱 시골 마을의 구원 요청 따윈 닿지 않았던 모양인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어깨가 푹 처진 채 무척이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먼 길을 왕복하느라 흙먼지가 잔뜩 묻은 신발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그의 무거운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가레스님.”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짐짓 가벼운 톤으로 우리가 길드에 제출했던 소식을 그에게도 전해주었다.

우리가 대삼림 깊은 곳에서 드래곤의 빈 둥지를 발견했으며, 녀석이 ‘다시는 찾지 마라’는 황당한 팻말까지 남겨두고 완전히 이곳을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를.

내 말이 끝나기가 무렵, 가레스의 가늘게 뜬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정말인가? 그 오만한 놈이 자리를 비우고 아예 떠났다고?”

“예, 길드에 증거품도 내고 왔어요. 이제 실베리아는 안전해요.”

그 순간, 평생을 전장에서 구르며 굳어 있던 노병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겉치레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자신이 일평생 흘린 피의 대가로 겨우 정착해 남은 여생을 보내려던 고향이, 마침내 완전한 안전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그를 감싸 안은 듯했다.

가레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어깨를 덥석 쥐었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내 평생 들은 소식 중 가장 최고군!

고맙네, 젊은 친구들!

다음에 우리 마을에 다시 들르면 그땐 내가 가장 비싸고 좋은 술로 밤새도록 대접하지!”

그는 지원을 못 받아 무겁던 걸음걸이는 어디 가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서둘러 마을을 향해 떠나갔다.

가레스가 완전히 멀어지자, 땅바닥을 뽈뽈거리며 걷던 식충이 녀석이 조그마한 가죽 날개를 파닥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명색이 드래곤이라고 제법 그럴싸하게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내 허리춤 높이에서 낮게 유영하듯 날아오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내 주변을 둥실둥실 비행하며 눈치를 살피는 식충이를 슥 쳐다본 뒤, 우리는 다시 수도를 향하는 머나먼 여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동하는 길에 녀석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나 지어주기로 했다.

밥을 잔뜩 먹고 나면 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꼴이 퍽 귀여워서, 우리는 녀석의 이름을 ‘벨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녀석도 마음에 드는지 벨리라고 부를 때마다 날개를 파닥이며 좋아했다.

그런데 이 벨리 녀석은 생각보다 우리 여정에 실질적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가장 먼저 체감된 변화는 주변에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형만 조그마한 잼 드래곤으로 강제 퇴화했을 뿐 본질은 천 년을 살아온 거대한 와일드 드래곤이 아닌가.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용위나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모양인지, 몬스터들은 멀리서부터 지려버리며 도망치기 바빴다.

덕분에 수도로 향하는 내내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구경하지 못했다.

쉐론과 함께 대륙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평탄하고 쾌적한 이동은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나와 쉐론은 이 녀석이 밥값을 넘어서 상상 이상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특히 밤이 되었을 때 벨리의 진가가 드러났다.

밤눈이 밝고 감각이 예민한 녀석이 캠프 주변을 지키고 서 있으니, 어둠을 틈타 기습해 오는 사나운 맹수나 밤눈 어두운 마물들도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보초를 둔 셈이었다.

매번 밤마다 교대로 불침번을 서느라 피로를 달고 살았던 나와 쉐론은, 벨리 덕분에 오래간만에 다리를 쭉 뻗고 그야말로 꿀맛 같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을 무렵, 갑자기 사방을 뒤흔드는 소란스러운 비명에 번쩍 눈이 떠졌다.

“으아아악! 불이야! 불!”

“살려줘! 드, 드래곤이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야습을 감행하려던 도적 무리였던 모양인데, 머리와 몸뚱이에 시뻘건 불을 붙인 채 비명을 지르며 부리나케 도망치기 바빴다.

엉덩이에 불이 붙어 강강술래를 추듯 날뛰는 꼴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

옆을 보니 쉐론은 이미 진작에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겁도 없이 캠프에 들이닥친 얼간이들이 벨리에게 아주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뭇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심에서 벨리는 제법 위엄 넘치게 조그만 가슴을 쫙 펴고는, 도망치는 도적들의 엉덩이를 향해 앙증맞은 불씨를 퉤, 퉤 뱉어내며 나름의 추격전(?)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리 작아졌어도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저 도적놈들은 평생 불 트라우마에 시달릴 터였다.

그 난리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음흉한(?) 계획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벨리가 제 입안의 매직백 같은 아공간에 그 어마어마한 보물들을 가득 채워 넣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었다.

저 든든한 무력과 기묘한 주둥이의 공간 능력. 그 두 가지가 결합하자 내게 아주 기막힌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그동안 내 가방 속에는 남들에게 쉽사리 꺼내 보여주지 못하는 강력하고 귀한 유물들이 그저 빛도 보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지난 로스칼 파티 때만 해도 당장 꺼내서 써먹을 만한 수많은 유물이 가득했지만, 도무지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었다.

성능 하나는 기가 막히게 확실한데, 출처를 해명하기가 너무 곤란해서 눈물을 머금고 꽁꽁 처박아 두기만 했던 쓸만한 아이템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 벨리 녀석을 통해서라면, 그 아까운 비장의 무기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 밖으로 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나중에 세계수의 묘목을 찾으면 그것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씰룩였다.

세계수의 묘목 같은 전설적인 유물이 필요해질 때, 슬쩍 벨리에게 뱉어내는 척하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고는 쉐론 앞에서 “어? 벨리가 둥지에서 챙겨온 아공간 속에 이런 게 들어있었네?” 하고 연기를 펼치면 끝이다.

쉐론 성격에 이 순진하고 멍청해 보이는 드래곤이 뱉어내는 유물을 보고 나를 의심할 리가 만무했다.

다 드래곤이 천 년 동안 모아둔 유산이거니 하고 납득하겠지.

뜻밖의 여정길에서 완벽한 ‘유물 세탁기’를 주운 셈이었다.

이 기막힌 시나리오가 짜이자마자 나는 곧바로 실행에 착수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쉐론의 눈을 피해 움직였다.

그동안 처박아 두었던 내 유물들도 정리할 겸 가방 구석에 쟁여두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벨리의 주둥이 속으로 던져 넣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유용하게 세탁해서 꺼내 쓰든, 아니면 이 식충이 녀석이 평생 제 아공간 속에 가보로 소장하든 일단 내 매직백에서 빼고 보는 것이다.

“자, 받아먹어. 이게 어떤 물건인지 잘 기억해야 해, 알았지? 그냥 삼키는 거 아니다. 네 아공간 속에 고대로 잘 모셔둬.”

내 주변을 날아다니며 넙죽넙죽 유물을 받아 삼키는 벨리를 보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참 보면 볼수록 복덩이가 따로 없는 녀석이었다.

물론 복덩이와는 별개로, 녀석의 체통 없는 짓거리를 실시간으로 직관하는 내 심정은 다소 복잡미묘했다.

명색이 환상종의 정점이라는 드래곤이건만, 내가 지구 시절 방구석에서 영화나 소설로 접했던 그 위엄 넘치는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홀로 지내서 그런지,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어린아이 같았고 말투 역시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함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최강 전력의 댕댕이를 한 마리 주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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