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첫 전투(1)

뜻밖의 거절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수많은 이들이 내 발치에 엎드려 제발 동행해달라고 애원하던 시절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비루한 한스 아닌가?

쉐론은 약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음··· 솔직히 한스, 당신은 우리 전력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 우리는 나름 베테랑, 스펠 메이지, 스펠 소드로 구성된 중급 브론즈 파티거든. 우리 레이나도 조만간 하이 메이지에 도달할 거야.”

아침부터 은근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 레이나가 거들었다.

“그래도 같이 다니기만 해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빌이 단칼에 잘랐다.

“아무리 봐도 체격이 검사 계열은 아니야. 솔직히 열심히 노력해도 워리어가 되긴 힘든 체질로 보여. 마법사가 되기엔 이미 나이가 너무 들었고. 레이나, 이건 우리 목숨이 걸린 문제야. 아무나 끼워주는 건 아닌 것 같아.”

쉐론이 말을 이었다.

“레이나는 언제나 모두에게 너그럽지만, 이번만큼은 안 될 것 같네.”

레이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잔챙이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예전 같았으면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지붕에 매달아 놨을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봐도 이런 혹을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긴 했다.

불쌍한 척하는 작전은 안 통할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 제가 비록 망한 귀족 출신이긴 해도, 집을 나오면서 꽤 챙겨 나오긴 했거든요.
조만간 길드 보상도 있고요. 그리고 여기 보세요!
이게 매직백이라 보기보다 짐이 엄청 많이 들어가거든요.
이동할 때 자잘한 짐들은 제가 여기 다 챙겨드릴게요.
제 실력이 부족하다면 앞으로 숙박비와 식비는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빌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오호, 나름 나쁜 조건은 아닌데? 우리가 항상 수입이 좋은 건 아니니까. 어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빌은 넘어왔다. 하지만 쉐론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이런 친구 돈이나 축내면서 돌아다녀야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그때 레이나가 번뜩 좋은 생각이 난 듯 말을 가로챘다.

“이러면 어떨까요? 아까 길드에서 들었는데, 이번에 칼로스의 마지막 행적을 쫓아 대규모 원정대가 꾸려진대요.
어차피 우리 파티도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하니까, 우리는 일단 그 원정대에 합류해서 칼로스의 마지막 행적을 확인하는 거에요.”

쉐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원정대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한스 씨는 먼저 모리야 마을로 향하는 거죠.
우리는 원정대를 마치고 모리야 마을로 넘어가고요.
혼자서 모리야 마을까지 가려면 몬스터도 많고 쉽지 않을 테니까, 만약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면 한스 씨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증명되는 셈이잖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빌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 모리야까지 혼자 뚫고 온다면 최소한 제 앞가림은 한다는 증거가 되겠어.”

레이나와 빌이 동조하자, 쉐론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러자고.”

쉐론은 “너 다른 모험가들 사이에 끼어서 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 하고 나를 흉포하게 노려보았다.

“결정됐네요! 한스 씨, 우리 모리야 마을에서 꼭 보기로 해요. 꼭이요!”

그렇게 우리는 모리야 마을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자기들이 쫓으려는 그 재앙의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지난번 전투에서 사용했던 검을 허리에 차고, 나머지 짐들은 모두 매직백에 넣고 슬슬 이동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날카로운 감각은 여전했지만, 보잘것없는 체력이 문제였다. 고작 반나절을 걷는 것조차 비명이 나올 만큼 힘들었다.

결국 날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했다.

적당히 요기를 하며 쉬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마을에서 나올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하지만 무적에 가까웠던 시절의 버릇이 문제였다.

예전 같으면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피라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금은 천하를 호령하던 칼로스가 아니라, 혼자 떠돌아다니는 거지 같은 몰골이 아닌가.

이런 녀석이 무방비하게 길을 당당히 가로지른다면 당연히 굶주린 늑대들의 먹잇감이 되기 마련이다.

스스로의 처지도 망각한 채 안일하게 행동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토록 둔해져서야 앞으로 닥칠 위험들에 제대로 대응이나 할 수 있을까.

“형씨, 생각보다 멀리 못 갔네?”

얼굴에 얕은 칼자국이 그어진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무리는 셋, 다행히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체력과 마력은 바닥일지 몰라도, 칼로스로서 수천 번의 사선을 넘나든 경험과 노련함은 여전히 내 몸에 각인되어 있다.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몰락한 귀족이라도 챙길 건 다 챙겼나 봐? 매직백에, 포상금으로 바꿀 증서까지 들고 있고 말이야.”

아까 레이나 일행과 이야기하던 내용을 엿들은 모양이다.

정말 어리석게도, 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돈이 있다고 광고를 한 셈이었다.

긴장감없이 대충 살던 시절의 오만함이 독이 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꺼··· 꺼져!”

이런, 말까지 더듬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이 빌어먹을 반지가 내 마력과 기세를 강제로 억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내면은 여전히 태평하게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으나, 반지의 속박에 묶인 육체는 그저 비루한 약자의 반응을 내보낼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그야말로 새털처럼 가벼운 겁쟁이, 그 자체였다.

“이 새끼 봐라?”

놈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곧바로 묵직한 주먹이 날아왔다.

휘둘러지는 기세를 보니 대충 견적이 나온다.

못해도 베테랑급 수준은 되는 놈이다.

단순한 길거리 양아치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버려진 용병단 출신이거나, 최소한 사선을 수없이 넘나든 흉악범이 분명했다.

이런 실력자가 왜 이런 숲에서 도둑질이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비루한 몸으로 정타를 맞았다간 뼈 몇 개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주먹의 궤적은 선명하게 보인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몸을 숙인 뒤 곧바로 무기를 꺼내 급소를 찌르는 반격의 시나리오가 끝난 상태였지만, 제길. 반지에 묶인 몸이 의지를 따라오지 못하고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굼뜨게 움직였다.

정교한 반격은 불가능했다.

나는 그대로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며 투박하게 몸을 던졌다.

반격이라기보다는 그저 들이받는 것에 가까운 ‘몸통박치기’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쪽은 오히려 놈이었다.

급소를 노린 건 아니었지만,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급작스럽게 파고든 찰나의 타이밍이 먹혀든 것이다.

순간, 세 놈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겉보기엔 그저 운 좋게 피해 간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든 모양이다.

“···이 자식이 건방지게…”

그중 한 명이 싸늘하게 내뱉으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숲의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 찼다.

칼을 꺼내야 하는데, 이런 XX···. 급한 나머지 지구에서나 쓰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과거, 무기 따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오만함 탓에 칼을 아무 데나 던져두었던 게 화근이었다.

이 비루한 몸뚱이로는 무기를 집어 들기도 전에 놈의 칼날이 먼저 내 목을 긋고 지나갈 게 뻔했다.

머릿속의 예측은 완벽했으나, 육체는 그 속도의 절반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칼을 뽑아 든 녀석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나는 칼집으로 손을 뻗는 대신, 아까 요기하던 그릇을 향해 발을 뻗었다.

투박한 발길질에 채인 그릇이 날아가 녀석의 안면에 정확히 명중했다.

쩌적! 하는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그릇이 산산조각 났다. 날카로운 사기그릇 파편들이 녀석의 눈가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악! 내, 내 눈이······!”

녀석이 깨진 눈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다.

코앞의 적이 고통으로 완전히 흐트러진 찰나, 나는 놈의 손목 아래, 칼자루의 밑둥을 강하게 쳐 올렸다.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칼이 허공으로 빙글 팽이처럼 솟구쳤다.

느릿하고 무거운 몸뚱이였지만, 궤적을 읽는 눈만큼은 여전했다. 떨어지는 칼자루를 낚아채며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커헉!”

숨이 막히는 비명과 함께 녀석이 상체를 웅크리며 고꾸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단칼에 놈의 허리를 두 동강 냈겠지만, 지금의 비루한 몸으로는 그런 파괴력을 낼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다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을 택할 뿐이다.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남은 녀석들을 응시했다. 제약이 걸린 몸치고는 뭐, 그럭저럭 해낸 셈이었다.

우측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반지의 속박으로 삐걱거리는 몸을 억지로 비틀며 칼을 휘둘렀다.

크게 휘두를 여유조차 없었기에, 녀석이 내딛는 발목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녀석도 발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만드는, 지독히도 노련하고 잔인한 수법이었다.

아까 몸통박치기에 넘어졌던 베테랑급 헌터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눈에 서린 장난기가 사라지고 진득한 살기가 차올랐다.

“그냥 몰락한 귀족 나부랭이는 아니었구나. 그런 몸뚱이로 이렇게 노련하게 움직인다고?”

녀석이 칼끝을 내 가슴에 겨누며 낮게 읊조렸다.

“칼로스의 갑옷을 입었다더니, 정말 칼로스의 영혼이라도 들어간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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