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놈들의 전력으로 봐서는 최소 브론즈 파티 수준은 됐을 텐데.”
아차. 도망친 그놈이 레이나 일행에게 무언가 설명을 한 모양이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얼른 대꾸했다.
“어? 어떻게 아셨죠? 안 그래도 오던 길에 도적 셋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았어요.
한 놈은 휘두른 칼이 나무에 깊숙이 박혀서 뽑질 못하고 버벅거렸고, 다른 놈은 다리를 크게 다친 상태였거든요.
덕분에 제가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도 제가 던진 그릇에 눈을 다쳐서 그 틈에 전 필사의 힘으로 도망쳤고요.”
대략적인 맥락은 맞다.
다만 주객이 전도되었을 뿐.
내가 그놈들을 피해 도망친 것으로 꾸미는 게 지금 내 처지엔 맞았다.
내 말을 듣던 레이나가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
“그놈은 자기가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던데······ 그것조차 거짓말이었나 보군요? 정말 비겁한 놈들이네요.”
“제가 그 세 명을 어떻게 상대하겠어요. 솔직히 두 명 잡은 것도 정말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죠.”
“······네? 소 뒷걸음질요?”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차, 나도 모르게 지구에서 쓰던 속담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이전 생의 지구의 기억과 아스란티어의 언어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섞이는 모양이다.
“아, 그러니까······ 그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려는데, 레이나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탁 쳤다.
“아! 혹시 남부쪽의 고어(古語)인가요?
소처럼 우직한 운명이 움직여서 미천한 쥐를 잡아 적을 징벌했다는······ 그런 뜻이죠?”
“······예? 아, 뭐······ 비슷합니다. 하하.”
“역시 귀족 출신은 다르네요. 그런 품격 있고 은유적인 표현을 쓰시다니. 정말 멋져요!”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는 레이나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운 좋게 얻어걸렸다는 뜻인데,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머쓱하게 웃으며 넘기자, 일행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깊게 캐묻지는 않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빌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운은 정말 우리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근처에 대형 마수가 나타났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고서는 저희가 살아서 돌아왔을 리 없습니다.”
쉐론 역시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그런 처참한 광경은 생전 처음 봤어.
이건 사람이 아니라, 굶주린 괴물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도와줬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의를 갖춰 칼로 베어 넘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찢어버렸으니까’.
남아있던 시체들이 괴물의 소행처럼 보인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존재와 이 비루한 ‘한스’를 연관 지을 녀석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때, 레이나가 방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우리한테 수호신이 생긴 것 같아요. 왠지 한스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거든요.”
수호신이라니. 방금 제 동료가 ‘괴물’이라며 몸서리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만과 안도감 속에서,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창문을 통해 길게 들이친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였다.
눈을 뜨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어제 반지를 개방했던 대가인지, 아니면 비루한 이 몸이 겪은 피로 때문인지 지독하게도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방 밖이 조용한 걸 보니 레이나와 그 동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레이나 일행은 앞으로 어떻게 ‘칼로스’의 행적을 찾아갈까.
나 스스로를 ‘칼로스’라고 지칭하니 기분이 묘했다.
분명 내 이름인데도 타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억겁 같던 세월이 내게 새겨놓은 그 이름은 금세 낡은 옷처럼 몸에 착 달라붙었다.
‘자, 그럼 이제 이 신출내기들이 내 흔적을 어떻게 파헤치는지 구경 좀 해볼까.’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문으로 향했다.
문을 삐걱 열고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빌과 마주쳤다.
“한스, 이제 일어났군. 나도 방금 눈을 떴어. 나머지는 이미 내려간 것 같은데?”
“아······ 그래요? 제가 좀 많이 잤나 보네요.”
이제는 자신을 동료로 인정한 듯 빌이 말을 놓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 덜 풀린 근육을 어기적거리며 빌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관 식당 구석 자리에서 쉐론이 먼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 한스, 우리보다 더 힘들었나 봐? 하하하! 우리보다 더 늦게까지 잠을 자다니 말이야!”
쉐론의 얄미운 농담에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니들이 뭘 알겠냐. 내가 니들 목숨 살리느라 수명까지 깎아 먹으며 고생한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철없는 아이의 재롱을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래, 귀여우니 봐준다.
나는 애써 멍청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쉐론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게요. 제가 원래 잠이 좀 많아서요. 하하.”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와 딱딱한 빵이 놓여 있었다.
텅 빈 위장이 고소한 냄새에 반응하며 꼬르륵 소리를 냈다.
그리고 빵 한조각을 물어 뜯었다.
지도를 갈무리한 레이나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한스 씨도 우리 정식 멤버가 되었으니, 서로 제대로 통성명을 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제안에 빌과 쉐론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견이 없는 눈빛이었다.
‘그래, 암. 그래야지. 내가 니들을 어떻게 살려줬는데. 이 정도 대우는 해줘야지.’
방금 전 쉐론이 은근히 나를 무시하던 기류가 눈 녹듯 사라졌다.
단순한 동행인이니 뭐니 해도 역시 ‘정식 멤버’이자 ‘든든한 후원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며 기분이 흡족해졌다.
“자, 그럼 저부터 다시 소개할게요.”
레이나가 허리를 꼿꼿이 펴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스란 마법 아카데미를 차석으로 졸업한 마법사, 레이나 에임즈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이 파티의 리더를 맡고 있죠.”
그녀의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빌과 쉐론도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먼저 빌이 듬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스란 기사 아카데미 출신 빌입니다.
레이나와는 학생 때 지인 소개로 알게 되어 파티를 결성했죠.
앞부분은 제가 확실히 책임질 테니, 우리 물주님께선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빌이 장난스럽게 던진 ‘물주’라는 표현에 쉐론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쉐론. 스펠 소드야.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고 그냥 길 위에서 구르다 합류했지.
뭐, 한스는 싸움 실력은 좀 부족해 보여도 모리야 마을까지 혼자 온 거 보면 생존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더라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쉐론의 말투는 여전히 시니컬했지만, 아까와 달리 나를 파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저… 저는 브린델 왕국 출신입니다.
가문이 기울면서 살길 찾아 출가한 막내 아들 한스라고 해요.
돈이야 좀 챙겨 나왔으니 여러분과 다니는 동안 불편함은 없게 할게요.
비록 칼 쓰는 실력은 여러분께 못 미치겠지만, 제 밥값은 충분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전에 스치듯 지나온 브린델 왕국을 떠올렸다.
워낙 작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그 나라를 배경으로, 나는 그럴듯한 몰락 귀족의 설정을 서둘러 급조해 냈다.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브린델 왕국 출신은 처음 보는 거 같네요.”
쉐론도 덧붙였다.
“과거 아스란 제국이 멸망한 뒤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도 많지.
크로센 왕국 옆에 붙어 있던 조그만 나라 맞지?”
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은 있어. 아버지가 예전에 그곳을 지나온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네.”
역시 워낙 작은 나라라 이름만 얼핏 아는 수준이다. 나라도 잘 모르는 판에 귀족은 더더욱 모를 터였다.
“자, 이제 소개도 마쳤으니 일 얘기를 해볼까요?”
레이나가 지도를 펼치며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이곳에 온 건, 과거 칼로스가 루멘 왕국에 막 들어섰을 때의 기록 때문이에요.
칼로스의 별명이 ‘재앙’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지나간 자리가 폐허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몬스터를 처치할 때 주변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고 힘을 쏟아붓기 때문이죠.
참 의외인 건, 그가 어느 지역을 가든 가장 먼저 한 일은 항상 보스급 몬스터를 찾아내 죽였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죠.”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저 가슴을 뛰게 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다.
살인귀가 피를 봐야 살아있음을 느끼듯, 나 역시 그랬다.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줄지가 궁금했다.
서른을 넘긴 시점부터 내게 전투는 이미 지루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심장을 뛰게 할 상대에 대한 갈증이 나를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재앙이라 불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전투 중에 주변의 피해를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내 칼질 한 번에 일반인들이 휩쓸리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의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했다.
전장에서 그런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쓰는 것 자체가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라 여겼으니까.
그 덕에 피해는 항상 막대했다.
특히 드래곤 같은 대형 몬스터라도 잡는 날에는…
왕국 하나가 통째로 박살 나는 경우도 있었다.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칼로스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찾아낸 몬스터는 모리야 마을 북쪽 숲의 주인, 야수왕 ‘칸쟈크’였어요.
기록에 따르면 칼로스조차 그때는 꽤 고전했다고 해요.
인근의 작은 마을들이 그 전투의 여파로 처참하게 파괴될 정도였으니까요.
문제는 늘 그랬듯 칼로스가 지나간 자리엔 남은 몬스터들이 더 흉폭해진다는 거예요.
이곳은 여전히 그 괴물들이 마을들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