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우리는 어제 봐두었던 동굴 근처의 수풀 속에 은밀히 매복했다.
정면에는 여전히 삼엄한 기세를 풍기는 익스퍼트 급 전사 한 명과, 검을 꼬여 쥔 워리어 네 명이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놈들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늘 밤이 바로 의식이 거행되는 만월의 날이기 때문이리라.
내가 레이나와 빌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작전이 시작이었다.
쿠구구구―!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이나의 마법이었다.
놈들의 발밑에서 거대한 바위 가시들이 거칠게 솟구치며, 대지 마법 ‘스파이크 록’이 폭발했다.
“기습이다!”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흩어지는 찰나, 수풀을 찢고 거대한 덩치가 호쾌하게 튀어나왔다.
포션을 먹고 완벽하게 회복한 빌이었다.
빌은 특유의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방패를 밀치고 검을 휘두르며 워리어급 전사들을 한 명씩 확실하게 쓰러뜨려 나갔다.
빌이 잔당들의 어그로를 완벽히 끌어준 덕분에 전장이 순식간에 양분되었다.
그사이 레이나는 우두머리인 익스퍼트급 전사를 향해 ‘스파이크 록’을 연사하며 계속해서 거센 압박을 가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바위 가시들에 당황한 익스퍼트급 전사가 전신에 기를 모아 대지를 크게 내리밟았다.
쿠웅!
소리와 함께 바위 가시들을 부숴버린 놈이 곧장 주문을 외우던 레이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우리 파티의 후방에는 든든한 마검사, 쉐론이 버티고 있었다.
쉐론이 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자, 검날을 따라 푸른 마력이 순식간에 휘감겼다.
곧이어 거칠게 뿜어진 그녀의 ‘블레이드 웨이브’가 쇄도하던 익스퍼트급 전사의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다.
놈의 몸이 순간적으로 주춤하는 찰나, 나 역시 질세라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몸을 날렸다.
허둥지둥 발을 헛디디는 척하면서, 검의 궤적을 낮춰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그어버렸다.
서걱!
“크아악?!”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며 다리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익스퍼트급 전사는 악에 받친 얼굴로 어떻게든 레이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발악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그 짧은 공백 사이 워리어들을 전부 처리한 빌이 어느새 놈의 등 뒤를 잡고 있었다.
푸시식!
빌이 체중을 실어 내지른 검이 익스퍼트급 전사의 등 뒤에서 가슴 깊숙이 꿰뚫고 튀어나왔다.
심장을 관통당한 익스퍼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숨을 거두었다.
빌이 검을 뽑아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제아무리 익스퍼트라도 기습만큼 무서운 공격은 없지!.”
우리는 지체 없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갇혀 있는 아이들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인원을 세어보니 정확히 13명. 영주의 흑마법 제단에 적혀 있던 제물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지금은 일단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게 최우선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굴을 벗어나, 추격조를 따돌리기 위해 한참을 우회하여 산을 내려왔다.
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피던 레이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제물로 쓸 아이들이 사라졌으니, 놈들도 다음 만월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정예 수하들까지 죽었으니 상황을 쉽게 전개하지는 못하겠죠.”
쉐론이 이어 말했다.
“그 미친 영주 놈이랑 굳이 싸우지 않고 넘어가서 정말 다행이군.”
경비병들이 전멸한 걸 알면 영주 저택도 발칵 뒤집힐 터였다.
13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영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우리는 천천히 영지 외곽을 우회하여, 제국의 수도인 루나미스로 곧장 돌아가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중, 나는 걸음을 멈추고 파티원들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아무래도 계속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구해내서 당장 의식은 못 치르더라도, 영주 놈들이 그 사위 녀석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우려돼서요.
제가 잠시 성 근처의 상황만 살피고 뒤쫓아 가도 될까요?”
내 돌발 행동에 레이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스 씨 혼자서요? 영주 저택 근처는 너무 위험할 텐데······.”
“제게는 기척을 감춰주는 ‘어둠의 망토’가 있으니, 숲에 숨어서 상황만 슬쩍 보고 오겠습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쉐론 씨가 쓰던 그 특수 피리를 제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말입니다.”
내 제안에 다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주의 추격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이 많은 아이들을 레이나와 부상에서 회복 중인 빌, 단둘이서만 호송하며 수도까지 가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든든한 쉐론이 호송대 쪽에 남아서 힘을 보태주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결국 내 설득에 고개를 끄덕인 쉐론이 품에서 피리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그렇게 나는 동료들과 잠시 길을 나눠, 혼자서 영주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은밀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영주의 저택 안으로 숨어드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복도의 어두운 구석, 나는 ‘어둠의 망토’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었다.
마침 저 멀리서 영주의 아들들로 보이는 형제 놈들이 낄낄거리며 다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그 익스퍼트 놈, 처음에 더럽게 비싸게 굴더니 결국 돈 앞에는 장사 없더라고요, 형님.”
“어차피 아버지가 의식을 치르고 그 평민 녀석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 지금 많이 쥐여줘 봤자 아무 상관 없지. 크크크.”
대화를 들어보니 놈들은 동굴의 경비조가 전멸당하고 아이들이 사라진 상황을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멍청한 놈들···’
나는 놈들이 지나간 사이, 텅 비어 있는 영주의 사무실로 조용히 잠입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깃펜을 들어 짤막한 글귀를 적어 내린 뒤 지체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메시지는 아주 명료했다.
[아이들을 찾고 싶으면 산 정상으로 와라.]
영주 놈들이 이 쪽지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아 산으로 달려오는 동안, 나는 먼저 판을 짜둘 생각이었다.
방을 빠져나와 은밀하게 저택을 탈출하려던 참이었다.
복도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두 남녀가 보였다.
얼른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지나쳐가는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하고 굳건한 기운이 느껴졌다.
뒷골목 시궁창에서 오직 제 실력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말이 단번에 납득이 가는 기백이었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들어보니, 서로를 끔찍이 아끼는 둘도 없는 부부처럼 보였다.
비열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저 사악한 영주 놈과 그 자식 놈들만 이 세상에서 치워버린다면, 제 힘으로 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며 참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녀석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커온 평민 사위의 올곧은 성품과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내면에서 차디찬 분노가 끓어올랐다.
저 가당치도 않은 탐욕 때문에 이런 녀석이 제물로 짓밟히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소리 없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나는 곧장 놈들이 의식을 치르려 했던 산 정상의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상에 도착하니 어젯밤에 제단을 지키고 있던 영주의 부하 두 명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루한지 하품을 쩍쩍 내뱉던 놈들 중 한 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볼일 좀 보고 올게.”
“빨리 와라.”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숲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놈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그리고 놈이 바지를 내리기도 전에, 소리 없이 다가가 뒤에서 단숨에 목을 그어버렸다.
서걱!
“읍······!”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사체를 받쳐 들고, 나는 곧바로 제단에 홀로 남은 나머지 한 놈에게 다가갔다.
망토의 은신 기능 덕분에 놈은 내가 코앞까지 다가갈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윽.
핏방울이 채 마르지 않은 검날이 놈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명 횡사한 두 녀석의 시체를 대충 수풀 속으로 밀어 던져버린 나는, 제단 기둥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질긴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오물오물 육포를 뜯으며, 나는 저 아래에서 곧 분노로 사시나무 떨듯 기어 올라올 영주 놈들을 천천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2시간 정도가 지났다. 생각보다 금방 오지 않았다.
‘놈이 책상 위의 종이를 못 본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늘어지게 하품을 쩍 내뱉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묵직해지며 이상함이 느껴졌다.
영주가 재단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주가 나를 가소롭다는 듯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주 제정신이 아닌 놈이군. 나한테 이런 협박을 하다니. 네가 원하는 게 뭐냐? 돈이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숲속에서 영주의 아들 놈들과, 5명 정도 되는 전사들이 나를 겹겹이 포위하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꽁꽁 묶인 채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는 낮에 봤던 그 평민 사위가 있었다.
순간 욱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으며 녀석들을 향해 픽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돈은 필요 없고. 그냥 저택에서 일을 치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미친놈, 애당초에 협상을 하려던 게 아니군!”
영주가 내 의도를 눈치채고 안색을 굳히자, 나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순순히 알려주면 목숨은 살려주지!”
영주의 으름장에 나는 픽 웃어 보였다.
“이걸 어쩌나. 이미 수도로 향하고 있어서, 다시 돌아오려면 내일이나 돼야 할 거 같은데?”
내 대답에 영주가 급분노하여 오른손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역시나 하이메이지였다.
순식간에 땅에서 거대한 손이 솟구쳐 나와 나를 덮치려 했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