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은밀한 빌드업

이 세계의 무력은 보통 6단계의 등급으로 분류된다.

가장 흔한 모험가를 예로 들면 스톤, 브론즈, 아이언, 미스릴, 아다만티움······ 그리고 나 정도로 나뉜다.

다른 클래스도 마찬가지다.

전사의 등급을 나누면 워리어, 베테랑, 익스퍼트,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그리고 나.

마법사는 메이지, 스펠 메이지, 하이 메이지, 아크 메이지, 그레이트 메이지······ 그리고 나.

마검사 역시 매직 워리어, 스펠소드, 룬 나이트, 매직 나이트, 그레이트 로드······ 그리고 나.

이 기준대로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현재 우리 파티원들의 실력은 겨우 브론즈에서 아이언사이에 걸쳐 있었다.

문제는 적어도 3단계 이상의 경지에 완전히 올라서야만 앞으로 마주할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칼로스, 즉 나와 관련된 사건의 상당수는 일반적인 상식과 규격을 아득히 벗어난 괴이한 것들이 태반이니까.

물론 여행을 거듭하며 파티원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쌓이긴 했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깨우는 거대한 깨달음이 있거나, 특별한 무기가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평범한 이들에게 단기간의 급성장을 바라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런 고민을 이어가며, 깊은 저녁 나는 홀로 방 안에서 매직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매직백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세계수의 묘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걸 내가 예전에 어디에 처박아 둔 것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짐을 뒤적거리던 중, 내 손끝에 낯선 물건 하나가 걸려 나왔다.

지난번 후드 녀석이 언급했던 ‘오르투스의 반지’였다.

먼지 쌓인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굳이 뼈를 깎는 수련이나 실력 향상이 아니더라도, 이 녀석들을 단숨에 업그레이드시킬 방법이 이미 이 매직백 안에 다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여태껏 전 대륙을 누비며 모아온 수많은 유물 중, 육체를 강화하거나 마나를 폭증시키는 종류는 차고 넘칠 터였다.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내가 파훼한 전설적인 던전만 해도 수도 없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쓸모없어 보여 대충 매직백에 쑤셔 박아둔 유물들이 산더미 같았다.

지금 손에 쥔 ‘오르투스의 반지’만 해도 그렇다.
이까짓 반지쯤이야
그냥 이 녀석들에게 줘도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대뜸 이 귀한 유물을 건네면, 녀석들이 나를 엄청나게 의심할 게 뻔하다는 점이다.

몰락 귀족 출신의 모험가가 어디서 이런 신화적인 유물을 무더기로 꺼내온단 말인가.

‘하지만······ 던전 같은 곳을 탐험하다가 극적으로 발견한 척 연기를 해서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가 하도 오랜 세월 세상을 싸돌아다니며 털어먹은 탓에 대륙의 대부분 유물이 씨가 마른 건 사실이지만, 적당한 던전에 이들을 데리고 들어가, 유물을 발견한 척 쥐여주면 그만이다.

던전에서 구르며 실전 경험도 쌓고, 내 매직백의 유물도 자연스럽게 양도하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디 보자, 쓸 만한 게 또 뭐가 있더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녀석들을 단숨에 한 단계 위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맞춤형 아이템’들을 본격적으로 매직백 깊숙한 곳에서부터 탈탈 털어 찾기 시작했다.

* * *

날이 밝고, 아침 식사를 하고자 한자리에 모였을 때 레이나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크웰로 우리 다시 가죠.

지난번에 우리가 블러드 그런트 베어와 맞닥뜨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은 정말 운이 좋게 다들 살아남았지만, 우리 파티가 앞으로도 계속 칼로스의 흔적을 쫓으려면 지금 상태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다들 동의하죠?”

그러자 쉐론이 격하게 공감하며 말을 받았다.

“맞아. 지난번에도 그렇고, 예전에 우리가 칼로스의 뒤를 쫓을 때는 칼로스가 강한 몬스터를 다 처치한 후라 큰 무리가 없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적들이 점점 강해지는 게 체감될 정도야.”

빌과 나 역시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의 반응을 살피던 레이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오크웰에 블러드 그런트 베어 같은 괴물이 있었다는 건, 필시 그쪽 던전의 몬스터들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실력도 쌓고 몬스터도 제거할 겸 그 던전으로 가는 거 어때요?”

“좋은 생각이야.”

나는 속으로 무릎을 탁 치며 레이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역시 영리하고 똑똑한 레이나였다.

‘뭐, 그 블러드 그런트 베어는 던전에서 기어 나온 게 아닌거 같지만···.’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제안이었다.

이번 기회야말로 녀석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던전 안에서 유물을 풀어버릴 최고의 무대가 될 터였다.

나는 매직백 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유물들을 떠올리며, 은밀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크웰 사건의 포상금이 정확히 언제 나올지 모르니, 우리는 일단 여관을 정리하고 오크웰로 향했다.

던전에 가서 신나게 던전을 구르고 수도로 돌아오면, 그때쯤 두둑한 포상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후 늦게 오크웰에 당도한 우리는 곧바로 이제 새로운 영주가 된 ‘에반 라이트’를 찾아갔다.

영주저택 집무실에서 우리를 맞이한 에반 라이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집안 사정이 여러모로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은인분들께 꼭 직접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가까이서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니 외모가 꽤 출중했다. 하지만 훤칠한 외모와 달리 그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늘진 안색을 눈치챈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제 몸이 아니라······ 아내가 이번 사태로 큰 충격을 받아 식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어서요.”

에반이 쓸쓸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친아버지와 오빠들이 추악한 의식을 위해 남편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충격이 오죽할까.

에반이 미안한 빛을 띠며 말을 이었다.

“당초 여러분이 오시면 저희 저택에 편히 머무르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의 추스를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신 저희 저택의 관리인을 통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에 묵으실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앞으로 오크웰에 언제 오시든 숙박만큼은 항상 제가 책임지고 챙겨드리겠습니다.”

에반의 과분한 호의에 내가 얼떨결에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으신데······”

“아닙니다. 어찌 보면 제 생명의 은인이시기도 하니, 저의 작은 정성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이제 막 영지를 물려받아 수습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녀석인데. 맨주먹으로 고생하며 커온 대견한 녀석의 지갑에서 돈을 빼먹는 것 같아, 묘하게 미안하고 찔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레이나가 짐짓 가벼운 어조로 에반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최근에 블러드 그런트 베어와 관련해서 들으신 소문이라도 있으신가요?”

에반이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저희 장인어른께서 작년 쯤에 어떤 자들로부터 그 곰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더군요.

헌데, 어찌 된 영문인지 어제 그 블러드 그런트 베어가 벼랑 밑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

장인에게 곰을 제어하는 법을 알려준 존재들.

그 말을 듣는 순간 영주가 벌인 추악한 흑마법 의식 배후에 또 다른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뇌리를 스쳤다.

내 안색을 살피지 못한 레이나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희는 혹시 던전에서 흘러나온 마수인가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장인어른이 생전에는 확실히 제어하고 계셨거든요.

아마 장인 어르신이 돌아가시면서 통제가 풀려 폭주하다가 추락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에반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던전 공략을 준비하러 가봐야겠네요.”

레이나가 깔끔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자, 에반이 싱긋 웃으며 배웅했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미리 길드장에게 전갈을 보내놓을 테니, 모험가 길드에 방문하셔서 필요한 지원을 마음 편히 받으십시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에반과 훈훈하게 인사를 나누고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영주 저택의 관리인의 안내를 받아 오크웰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우리는 다음 날 있을 던전 입사를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던전에 한 번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몇 주에서 몇달씩 머무는 경우가 허다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구조 탓에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라, 충분한 식량 확보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아스란티어 대륙의 던전은 지름이 5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덩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거대한 구멍을 중심으로 끝없이 밑으로 내려가는 구조인데, 내려가는 길목마다 중간중간 통로가 나 있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통로 내부로 한 걸음만 들어서면 시시각각 위치가 바뀌는 미로가 펼쳐지기 때문에 탐색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곤 했다.

물론, 깊이 내려갈수록 위험해지는 만큼 더 강력한 몬스터와 풍부한 자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우선 우리는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기로 했다.

던전 안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먹을 수도 있지만, 매번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이 번거롭기 때문에 대부분은 완성된 식량을 미리 챙겨가는 편이다.

그래서 상급 헌터들은 대개 ‘매직백’에 식량을 가득 채워 던전으로 향한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마력이 거의 없는 일반인이라도 일반 배낭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짐을 넣을 수 있으니, 헌터들이 일반 가방을 선호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기를 상시 파지해야 하는 헌터들에게 거추장스러운 배낭은 전투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비싸더라도 결국 헌터 생활하면 반드시 구비하게 되는 물품이 매직백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행선지에서 보급과 숙박을 책임지게 된 나에게 음식 준비는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내 매직백은 일반적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초월적인 공간을 자랑하니까. 식사 수천 끼쯤은 끄떡없이 들어갈 터였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매직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매직백에 따뜻한 음식을 가득 채워 넣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 왠지 모르게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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